
기록하는 연구자, 장소정대원
연구탐사대 부트캠프 7기 수료대원의 이야기
해당 글은 연구탐사대 부트캠프 7기 수료생, 소정 대원님이 부트캠프에서 진행한 주제를 발전시켜 논문게재를 진행한 것을 응원하기 위해 마련된 팝업세미나에서 다룬 내용입니다. 팝업세미나는 연구탐사대원의 연구활동을 응원하며 연구과정에서의 작은결실이 있을 때 그 내용을 나누고, 연구의 비하인드스토리를 공유하며 앞으로의 계획을 선언하는 자리입니다. 세미나 영상과 논문은 글 하단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청년, 과연 사회운동을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저는 "청년은 이미 사회운동을 하고 있었다"라는 대답을 던지고 싶었습니다. 흔히 2016년 탄핵 광장 이전에는 청년들의 사회운동 참여가 미미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청년들, 특히 여성들은 그 훨씬 이전부터 계속해서 사회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수많은 여론과 학계는 이들을 운동의 주체로 호명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특히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 운동’에 뛰어들었던 20대 청년들의 경험을 어떻게 발굴하고 역사화할 수 있을까를 치열하게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그 고민의 결과물이 이번 연구탐사대 부트캠프와 스프린트 과정을 거쳐 한 편의 논문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외로움 속에서 발견한 연대의 기록
이 연구의 출발점은 제가 자원 활동을 하던 중 우연히 마주친 ‘한 뭉치의 종이’였습니다. 사실 제 또래의 젊은 페미니스트들에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상대적으로 관심도가 낮은 이슈였습니다. 디지털 성폭력, 데이트 폭력 등 당장 우리 주변에 횡행하는 수많은 폭력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보니, 위안부 문제는 그저 ‘아주 옛날에 있었던 일’로 여겨지는 경향이 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본질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몸이 어떻게 물화되고 교환되어 왔는지를 구조적으로 보여주는 핵심적인 사안입니다. ‘왜 이 중요한 문제에 다들 관심을 가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현장에서 활동하던 제게 깊은 외로움을 안겨주었습니다.
그 외로움을 어떻게 끌어안고 갈 수 있을까 고민하던 와중에, 박물관에서 90년대 활동가들이 손으로 쓴 낡은 자료들을 스캔하고 PDF로 전사화하는 자원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2000년대 대학생들이 주도해 만들었던 ‘2000년 학생 법정’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발췌된 신문기사를 읽어 내려가며, 저는 저와 비슷한 나이의 여성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치열하게 운동을 이어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주 짧은 기록이었지만 저에게는 그 무엇보다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 운동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더 이상 외롭지 않게 연대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역사를 제대로 정리하고 기록해야겠다는 결심이 섰습니다.
3,000여 건의 데이터, 개인의 기억을 역사로 만들다
이후 활동가로 본격적인 일을 시작하면서 과거 자료에 대한 접근성이 좋아졌고, 본격적으로 관련 데이터를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핵심적인 법정 자료집과 결과 보고서뿐만 아니라 엄청난 양의 사진 자료가 보존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방대한 데이터를 분류하고, 해석하는 작업은 생각보다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막막했던 기간 동안 저를 붙잡아 준 것이 바로 연구탐사대의 부트캠프와 스프린트 과정이었습니다. 2024년 여름 무렵 시작해 논문이 나오기까지 거의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본업에 치여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부트캠프를 통해 "내가 왜 이 연구를 시작했고,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뾰족하게 다듬을 수 있었고, 이는 연구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강력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어지는 스프린트 과정에서는 전사화된 자료들을 논문의 뼈대에 맞게 정제하여 배치했습니다. 매주 동료들과 진행 상황을 나누며 ‘우리가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끈끈한 감각 덕분에 논문 작성까지 완주할 수 있었습니다. 단순한 사료 정리집을 넘어, 이 역사가 지니는 의미에 연구자의 고유한 해석을 더한 학술지 논문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청년 주체의 복원, 그리고 이어지는 운동의 생명력
이번 논문이 가지는 가장 핵심적인 학술적 의의는 '2000년 학생 법정'이 단순한 모의재판 행사가 아니라, 한국 사회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음을 증명해 낸 것입니다. 그간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 운동에 대한 선행 연구들은 주로 주류 시민사회단체나 기성단체 활동가, 혹은 피해 생존자들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청년들은 행사의 수동적인 참여자로 취급받곤 했습니다. 하지만 제 연구는 청년들이 이미 자신들만의 운동을 주체적으로 구축하고 있었음을, 이들이 단순한 참여자가 아닌 명백한 기획자이자 실행 주체였음을 전복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기록은 현재진행형인 우리 모두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이제 피해 생존자 할머니가 단 여섯 분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생존자가 모두 세상을 떠나시면 이 문제는 정말로 ‘과거의 옛날 문제’로 박제되어 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과거의 이 운동이 사실은 지금을 살아가는 나의 삶과 결코 동떨어질 수 없는 문제임을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제가 다룬 것은 2000년의 기록이지만, 이 운동은 2010년, 2020년을 거쳐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연구는 그 단단한 연결고리를 잡는 작업이며, 앞으로 우리의 사회운동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진단하는 나침반이기도 합니다.
논문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입니다
20쪽 내외의 짧은 논문으로 일단락되었지만, 저는 이 작업이 이제 막 첫발을 뗀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지면에 담지 못한 회의록, 필기 노트, 사진 자료 등, 해석해야 할 것들은 무궁무진하게 남아있습니다.
앞으로 풀어내야 할 후속 연구의 주제도 많습니다. 많은 활동가들이 극심한 감정적 소진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어떻게 그 고통을 승화해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는지는 반드시 심도 있게 다뤄져야 합니다. 또한, 2000년 이후 한국 정부가 일본군’위안부’피해생존자에 대한 지원법을 '생존자 지원법'에서 '피해자 보호법'으로 변경하면서 생긴 결과에 대해서도 학술적 조명이 필요합니다. 이번에 연구탐사대에서 지원받은 소중한 연구비로 게재료를 해결했는데, 다음에는 이 내용들을 영어로 작성해 해외 학술장에도 말을 걸고 싶다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습니다.

현장과 연구를 잇다: 활동을 기록하는 것 자체가 '활동'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이 여정을 통해 온몸으로 느낀 '사회문제 해결 연구자'의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처음 연구탐사대에 합류할 때에는 활동가였고, 이 논문 역시 활동가의 이름으로 발표하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활동가로서 현장을 지키며 글을 쓰고 연구를 병행한다는 것은 뼈저리게 고독하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척박한 현장에 있는 활동가일수록 더 깊은 공부와 연구가 필요하다고 굳게 믿습니다. 연구는 수없이 많은 연대를 만들어내고 상호작용을 일으키는 실천적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사회문제를 연구하려면 한 발은 연구에, 한 발은 현장에 담가야 한다"고 말하지만, 현실적으로 양쪽에 완벽히 균형을 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저 역시 현장에 온전히 발을 담그는 데는 결국 실패했고, 한 발 물러서서 연구 단체로 자리를 옮겨 시간적·공간적 여유를 확보한 덕분에 비로소 이 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과 글을 끊임없이 이어붙이는 작업은 우리에게 너무나 절실합니다. 사회문제 해결형 연구자일수록 이 매개자의 역할을 기꺼이 감당해야 합니다. 현장의 활동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 그것 자체가 이미 훌륭한 사회적 '활동'입니다. 두 가지는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점점이 흩어진 개인의 기억들을 하나로 이어 붙여 단단한 역사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지금 이 순간에도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수많은 현장의 활동가와 연구자에게 연대의 의미로 가닿기를 바랍니다.
해당 글은 지난 2월 12일 진행한 연구탐사대의 9번째 팝업세미나의 내용을 바탕으로 편집된 글입니다. 연구탐사대는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연구하는 이들을 위한 연구훈련 커뮤니티입니다. 연구탐사대에서는 실전형 연구훈련프로그램 <부트캠프>와 사회문제연구자를 위한 철학스터디 <철학산책>, 문제중심 연구지원사업 <펠로우십>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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