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07 신남철의 휴머니즘
인간이 역사를 움직인다
해당 글은 연구탐사대에서 진행하는 철학스터디, 철학산책 시즌6에서 다룬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한 글입니다.
같은 경험, 다른 반응
BTS의 새 뮤직비디오를 본 해외 팬들은 환호했다. 소리를 지르고,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같은 영상을 본 우리 중 상당수는 담담했다. "뭐야 이게?" 정도의 반응. 그 차이는 뭘까?
역사의식의 유무다. 화양연화부터 이어진 서사를 알고 있는 팬에게 그 영상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한 줄로 꿰어지는 사건이다. 반면 맥락 없이 접한 사람에게는 그저 또 하나의 영상일 뿐이다. 이 차이가 바로 일제강점기 철학자 신남철이 말한 역사의식과 시대의식의 간극이다.
철학산책 시즌6 일곱 번째 시간, 우리는 신남철의 휴머니즘을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꺼냈다.
역사의식과 시대의식 — 두 개의 눈

신남철에 따르면 역사의식은 보편적인 법칙과 세계 역사에 대한 통찰이다. 인류 역사가 어떤 엔진으로 움직이는지를 이해하는 것.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인과관계를 통시적으로 파악하는 힘이다.
시대의식은 다르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발딛고 있는 현실에서 구체적인 모순과 위기를 인식하는 것이다. 횡단면을 잘라 현재의 리얼리티를 직시하는 공시적 감각.
이 두 가지가 적절히 연결되면 "역사 속에서 지금의 문제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생긴다. 그런데 역사의식이 사라지면?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라는 막막함만 남는다. 반대로 시대의식이 사라지면? "운명은 결정돼 있어, 이렇게 흘러가는 거야"라는 체념에 빠진다.
신채호 선생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고 했던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그 역사의식이 시대의식과 만날 때, 우리는 비로소 구경꾼이 아닌 역사의 주체가 된다.
헤겔에서 마르크스, 그리고 신남철로
역사의식의 정수는 헤겔이었다. 변증법을 역사에 깔아놓고 보니, 원시 공산사회에서 고대 노예사회, 중세 봉건사회를 거쳐 자본주의로 왔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과도기 사회주의를 거쳐 미래의 공산주의 사회로 간다 — 이것이 마르크스가 발견한 역사적 패턴이었다.
이 역사의식을 탑재한 채 1920~30년대 일제 치하의 경성을 바라보면 어떻게 될까? 신남철은 당시 조선을 "근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과도기"로 보았다.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제국주의가 만들어졌고, 자본주의가 붕괴하면 제국주의도 무너진다. 그렇다면 그 이후를 준비하는 것이 지식인의 소명이 아닌가?
그런데 신남철은 마르크스에서 한 걸음 더 나갔다. 변증법적 유물론이 "자연이 세계를 움직인다"고 보았다면, 신남철은 "아니, 움직이지 않는 물체를 움직이게 만드는 핵심은 인간이다"라고 했다. 세계를 구성하는 인간, 자연, 사회 중에서 이 세 가지를 실제로 변화시키는 주체는 신체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 여기서 신남철의 휴머니즘이 태어난다.
신이 사라진 자리에서 인간을 정의하기
신남철은 인간에게 필요한 가치를 먼저 물었다. 존재론이나 인식론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론을 먼저 제시한 것이다. 인간은 그대로 있는데, "인간에게 필요한 가치는 무엇인가"를 묻는 방식.
그 답을 찾기 위해 신남철은 르네상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데카르트와 스피노자가 신을 지운 이후, 인간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중세의 위계 질서 꼭대기에 있던 신이 사라지면 인간 존재의 근거도 흔들린다.
여기서 두 갈래가 갈린다. 아래에서부터 올라가는 유물론 — 인간은 물질이고 신체이며 중력을 받는 존재다.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유심론 — 인간의 마음과 정신이 본질이다. 르네상스와 독일 낭만주의는 이 둘을 연결하려 했다. 실제계와 상상계를 잇는 방식으로 그리스 로마 시대의 인간상을 복원하는 것.
신남철에게 이르면, 이 연결은 더 구체적이 된다. 정신(사상)과 신체(자유)가 만나는 지점에 휴머니즘이 있다. 생각만으로도, 몸만으로도 인간을 온전히 정의할 수 없다. 시와 소설을 쓰고, 책을 읽고 대화하는 문화적 실천 속에서 정신과 신체가 만날 때, 비로소 인간다움이 구현된다.
의심, 판단, 그리고 실천
신남철의 박사 논문은 프란츠 브렌타노의 지향성 이론을 다룬다. 브렌타노에 따르면 의식이 대상을 포착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의심이다. 내가 본 것이 맞는가? 저것이 정말 저런 것인가?
그다음이 판단이다. 대상을 머릿속에 표현(express)하고, 그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는 가치를 결정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실천이 온다.
신남철이 주목한 것은 이 세 단계 사이의 간극이다. 의심했지만 판단을 제대로 할 수도, 못 할 수도 있다. 판단했지만 실천에 옮길 수도, 안 옮길 수도 있다. 바로 이 간극 속에서 모든 사람이 능동적으로 삶을 살아갈 가능성이 열린다.
예를 들어보자. "자본주의가 정말 바뀔 수 있을까?" — 이것은 의심이다. "안 바뀔 것 같은데" — 이것은 판단이다. 그 판단에 따라 주식 투자와 갭투자에 매진하는 것 — 이것은 실천이다. 반대로 "바뀔 수 있다"고 판단한 사람은 전혀 다른 실천으로 나아간다. 삼일운동에 나선 수만 명의 민중처럼.
문화라는 이름의 생활양식
신남철에게 개인의 실천이 반복되면 패턴이 되고, 그 패턴이 라이프스타일이 되며, 그것이 곧 문화다.
문화 속에 젖어 있으면 역사의식이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동시대가 공유하는 것들을 인식하기 때문에 시대의식도 따라온다. 하지만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거나 문화적 공유 지점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자기 인식이 왜곡된다. 자기를 비춰줄 거울 없이, 박수만 받으며 살아온 사람이 결국 타인과의 관계에서 충돌하는 것처럼.
신남철이 신문화론을 주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를 쓰고, 소설을 만들고, 대화하는 것 — 이 문화적 실천이 역사의식과 시대의식을 연결하는 매개다. 문화를 만드는 힘이야말로 과도기를 넘어 새로운 사회로 가는 동력이라고 본 것이다.
이것은 현실 사회주의와는 결이 달랐다. 사회 전체의 구조를 중시하는 공산주의에서 독립적 개인의 문화적 실천을 강조하는 신남철은 이단적이었다. 그래서 북한으로 넘어간 뒤에도 사상투쟁에서 밀려났고, 결국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 사이에서
신남철의 모순론은 우리 삶의 근본적 긴장을 드러낸다. 주관과 객관, 나라는 존재와 나를 둘러싼 사회 시스템은 항상 충돌한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가정, 사회, 국가라는 객관적 시스템에 던져져 있기 때문이다.
움직이는 것을 중시하면 에너지는 증가하지만 무질서도 증가한다. 움직이지 않는 것을 중시하면 질서는 늘어나지만 에너지는 떨어진다. 진보와 보수의 영원한 긴장이 바로 여기서 나온다.
신남철은 이 모순을 없애려 하지 않았다. 모순은 변증법의 연료이고, 정반합을 통해 세계가 전진하는 동력이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끊임없이 뒤바뀌듯, 생산 관계의 변화가 역사를 만든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언제나 신체를 가진 실천하는 인간이 있다.
나가며
관조하는 철학자가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실천가 — 그것이 신남철이 그린 인간상이었다. 독일 관념론이 세계를 인식계와 감성계로 정밀하게 나누었지만, 정작 행위하는 인간의 신체는 빠져 있었다. 신남철은 그 빈자리에 몸을 가진 사람을 세웠다.
다음 주, 우리는 신남철의 동시대인이자 더 급진적인 실천가 박치우를 만난다. 문화로 과도기를 준비했던 신남철과 달리, 박치우는 빨치산이 되어 위기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같은 시대, 같은 고민, 그러나 전혀 다른 선택. 그 갈림길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함께 나눈 생각들
변증법적 유물론은 한국에서도 해석과 적용이 가능한가?
— 모순의 투쟁 너머를 상상하다
한국의 근현대사 자체가 변증법적 유물론의 사례라는 의견이 있었다. 광복에서 독재로, 독재에서 민주화운동으로, 그리고 민주정으로 — 이 흐름 안에서 모순의 투쟁이 실제로 역사를 추동해왔다는 인식이다. 그러나 동시에 "꼭 모순의 투쟁을 통해서만 발전하는가?"라는 근본적 의문도 제기되었다. 국가제도와 시민사회라는 이분법 자체가 깨지는 시대에, 무엇을 새롭게 상상할 수 있을까.
한편에서는 자유주의가 야기한 개인주의와 전쟁으로 인한 일상의 변화를 교차하며 바라보는 시선도 있었다. 국가를 떠나서 개인의 진정한 자유를 실현할 수 없다는 명제가 현대사회에서도 유효한지, 주가 변동과 일상의 불안 사이에서 계속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AI라는 새로운 생산수단이 등장한 지금이 또 다른 변증법적 투쟁 상황이라는 분석도 인상적이었다. AI가 개인의 실천적 수단이 되어 새로운 체제를 상상하게 할 수 있는지, 그것이 반드시 더 나은 해방으로 이끌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 이어졌다. 모두가 자본가가 되고자 하는 사회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이 갖는 새로운 의미를 함께 고민했다.
식민지 이후의 유토피아는 어떤 모습인가
— 신남철의 대안을 오늘에 비추다
신남철이 꿈꾼 대안에 대해 대원들은 다양한 각도에서 접근했다. 무계급 사회라는 유토피아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휴머니즘이고, 그 실현을 위한 수단이 문화운동이라는 신남철의 구조를 정리하면서, 한편에서는 "엘리트주의가 아닌 듯, 그보다 더 엘리트주의인 듯"하다는 날카로운 관찰도 나왔다. 민중적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도 결국 지식인의 역할을 강조하는 신남철의 이중성을 짚은 것이다.
개인의 몸을 물리적 수단이 아닌, 고유성과 주체성을 만들어가는 핵심 요소로 파악해야 한다는 의견은 신남철의 신체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었다. 물리적 부산물보다 개인이 현재 이 시점에 실천하는 행위 자체가 가장 핵심적이고 종합적인 "합"의 결과라는 통찰이다.
"나의 유토피아는 문제를 풀어내는 현장에 필요한 지식이 충분히 공급되는 것. 그러기 위해 필요한 건 '예언자적 연구자'로서의 핵심가치를 가지고 지식을 생산해내는 것."
이 문장은 신남철의 예언자적 지식인론을 연구탐사대의 언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학술연구공동체를 넘어선 새로운 연구공동체, AI 시대에 인간 고유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들이 자연스럽게 뒤따랐다.
연탐대장의 단상노트
신남철의 철학은 한 마디로 '휴머니즘'이었어요. 역사의 흐름을 유물론적 변증법으로 봤지만, 자연과 구조를 본 마르크스와는 다르게 변증법의 중심에 '사람'을 세웠기 때문이에요.
세상을 바꾸는 건 시스템과 구조가 아닌, 그 시스템 안에서 의심하고, 판단하고,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신남철은 이미 알고 있던게 아니었을까요? AI시대에 문제를 해결하는 건 그저 '기술'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도 같은 맥락 위에 있어요. 모순의 역사 안에서 우리가 문제를 풀고자 하는 그 진심 위에서 역동하는 우리가 100년 전 신남철의 휴머니즘의 모습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 주 박치우는 신남철과 같은 고민을 안고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한 사람이에요. 문화냐 투쟁이냐, 그 갈림길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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