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01 한국의 철학과 한국철학의 현대
한국의 철학은 있는데, 한국철학은 없다?
해당 글은 연구탐사대에서 진행하는 철학스터디, 철학산책 시즌6에서 다룬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한 인사이트글입니다.
한국에서 철학을 한다는 것
"한국의 철학자"라고 하면 대부분 칸트를 연구하는 교수, 공자를 해석하는 학자를 떠올린다. 한국에서 철학을 하는 사람은 많다. 그런데 한국철학을 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한국의 철학'과 '한국철학'은 같은 말이 아니다. 전자는 한국 땅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철학적 활동을 뜻한다. 후자는 한국인의 역사적 경험과 사유 전통에서 자생한 고유한 철학을 가리킨다. 이 구분이 중요한 이유가 있다. 우리가 지금 철학이라고 부르는 것의 대부분이 서양에서 수입된 개념 체계이기 때문이다.
수입된 렌즈로 자기를 볼 수 있는가
개항 이후 한국 지식인들은 서양철학을 급속히 받아들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을 경유한 독일 관념론과 마르크스주의가 유입되었고, 해방 이후에는 미국식 분석철학과 실존주의가 대학을 장악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한국 고유의 사유 전통이 '전근대적인 것'으로 밀려났다는 점이다.
유교, 불교, 도교의 오랜 전통이 있었지만, 근대 학문 체계 안에서 이것들은 '동양철학'이라는 범주에 묶여 중국철학의 하위 분과로 취급되었다. 한국의 성리학이 조선 500년간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사단칠정 논쟁, 인물성동이 논쟁 같은 정밀한 철학적 성취는 오랫동안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한국철학의 고유한 힘: 공존의 사유
한국철학사를 관통하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 하나의 교조에 맹목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여러 가치 체계를 공존시키는 능력이다.
삼국시대에 불교가 들어왔을 때 한국은 토착 신앙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 고려는 유교적 정치 체제와 불교적 세계관을 동시에 운영했다. 조선은 성리학을 국시로 삼으면서도 민간에서는 무속과 불교가 살아 있었다. 이것은 사상적 혼란이 아니라, 다른 가치를 배제하지 않으면서 자기 기준을 세우는 방식이었다.
근대에 와서 이 공존의 사유는 더 극적으로 드러난다. 최제우는 동학을 통해 서양의 '서학'에 대응하면서도 유불도 삼교를 융합했다. 박은식은 양명학이라는 중국 철학의 틀을 빌려 민족적 자강론을 전개했다. 외래 사상을 단순히 모방하지 않고, 자기 상황에 맞게 재구성하는 것이 한국적 사유의 방식이었다.
유불도삼교(儒佛道三敎)는 유교·불교·도교를 서로 배타적인 종교로 보지 않고, 한 사회의 삶과 윤리 속에서 함께 공존하거나 융합될 수 있는 세 전통으로 보는 관점
나가며. 왜 지금 한국철학인가
1960년대 박종홍을 시작으로 한국 고유의 철학적 전통을 체계화하려는 시도가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대학의 철학과에서 한국철학은 주변부에 머물러 있다.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서양철학의 개념 틀로 한국의 경험을 설명하는 것이 '철학'이 아니라, 한국인이 자기 경험에서 길어올린 사유가 보편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느냐는 것. 한국철학의 '공존의 사유'는 가치 충돌이 일상인 오늘날, 단일한 원리로 환원되지 않는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철학산책 시즌6은 이 물음에서 출발한다. 근대 한국이 낳은 사상가들의 고투(苦鬪)를 따라가며, '한국철학'이 무엇인지를 함께 찾아가는 여정이다.
함께 나눈 생각들
'우리 철학'의 정체성 — 고정된 실체인가, 재구성되는 과정인가
대원들 사이에서는 '우리 철학'이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과정이라는 데 대체로 공감이 모였다. 개화기, 일제강점기, 광복 이후 — 각 시대가 던지는 질문이 달랐고, 질문이 달라지면 사고하는 방식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 인간의 기질과 성격도 경험을 통해 변화하며 인격을 이루어가는데, 하물며 철학이라고 바뀌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도 나왔다.
흥미로운 갈래는 여기서 생겼다. 변화를 인정하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시각이 있었다. 백성에서 시민으로 이어지는 큰 틀, 한민족이라는 정체성,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라는 통시적 질문 — 재구성의 와중에도 관통하는 중심이 있다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일제강점기라는 시대 상황이 철학의 발전을 가로막고, 독립과 함께 모색하던 방향마저 물거품이 된 것은 아닌지 묻는 목소리도 있었다.
'우리'의 범위 자체를 다시 생각해보자는 관점도 등장했다. 물리적 공간을 넘어 상호작용하는 모든 사람들의 생각까지 포함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임의로 창제된 고유의 언어를 가진 문화, 강점기 후 문화를 되찾은 경험 — 이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소화하느냐에서 오히려 정체성이 드러난다는 시각이었다.
"강의 원류부터 수많은 물줄기가 모여 큰 강을 이루듯, 모든 시대의 사람들의 생각이 모여 철학의 흐름을 만든다."
"끊임없이 재구성되면서도 우리의 유토피아를 기대하며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연탐대장의 단상노트
이제 드디어 한국철학을 봅니다. 거칠게 말하면 이번 시즌을 위해 시즌 1 부터 영미, 프랑스, 독일, 중국 철학을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예요. 사회문제를 연구하며 대안을 제시하는 우리들에게 있어 가장 생동감이 넘치는 연구의 장이 '한국의 근현대'였기에 이 시대상을 이해하고자 서양철학사상사를 바라보며 왔습니다.
하지만, 참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철학은 철학세계에서 꽤나 주변부에 위치해있다고 해요. '한구에 철학자가 있어?'라는 질문을 받기도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철학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룬 것이 한국현대철학을 시작하는 지점에서 정말 흥미로웠습니다! 우리의 세상은 우리의 렌즈로 보기 위해 한국현대철학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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