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06 신채호의 민중중심사상
민족을 넘어 민중으로 — 신채호가 역사를 무기로 삼은 이유
해당 글은 연구탐사대에서 진행하는 철학스터디, 철학산책 시즌6에서 다룬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한 인사이트글입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정말로 일어나는 일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이 문장의 주인공이 신채호다. 그런데 이 문장을 단순한 경구로만 기억하면 신채호를 절반도 이해하지 못한 셈이다. 그에게 역사는 과거의 기록이 아니었다.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결정하는 존재론적 토대였다.
신채호가 살았던 시대를 떠올려 보자. 일제는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전국의 사료를 수거했다. 항아리부터 고문서까지 닥치는 대로 가져갔다. 그리고 자신들의 관점으로 조선의 역사를 20권 넘게 다시 썼다. 파괴한 것은 종이가 아니었다. 민족의 존재론 자체를 교체하려 한 것이다.
존재론이 바뀌면 행동이 바뀐다
왜 역사가 그토록 중요한가. 철학에는 아이스버그 모형이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은 행동(performance)뿐이다. 그 아래에 원리(principle)가 있고, 원리 아래에 관점(perspective)이 깔려 있으며, 가장 밑바닥에 존재론(presupposition)이 자리한다.

세종대왕, 이순신, 한강 작가가 우리의 존재론에 깔려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독립적이고 창의적인 민족"으로 인식한다. 위기가 닥치면 "우리가 창의적으로 해결해보자"는 원리가 작동하고, 실제로 새로운 방식의 대응이 나온다.
반대로 이완용, 민비, 고종이 존재론에 깔려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생존이 급한 존재로 인식한다. 원리는 눈치와 굽신이 되고, 행동은 수동적 복종이 된다. 같은 사람이 같은 위기를 만나도, 존재론이 다르면 전혀 다른 행동이 나온다. 신채호는 이 구조를 꿰뚫었다.
실증, 상대, 구조 — 역사를 보는 세 가지 눈
신채호의 역사관을 이해하려면 역사학의 세 갈래를 알아야 한다.

실증주의 사학은 19세기 랑케에서 시작됐다. 주관을 배제하고 객관적 사료에 근거해 사실을 확정한다. 문제는 사료를 누가 쥐고 있느냐다. 조선사편수회가 사료를 몽땅 가져간 상황에서 실증주의는 오히려 일제의 무기가 됐다.
상대주의 사학은 E.H. 카의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명제로 요약된다. 현재의 관점이 과거의 해석을 결정한다. 지도를 뒤집어 보면 한반도가 고립된 반도가 아니라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해상 거점으로 보이는 것처럼, 관점 하나가 역사 전체를 뒤바꾼다. 그러나 이 논리는 반대로도 작동한다. "우리는 토끼다,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관점을 주입하면 과거도 미래도 무력해진다.
구조주의 사학은 마르크스주의 역사관에서 출발한다. 영웅이나 개인이 아니라 경제적 토대와 민중의 삶이 역사를 움직인다고 본다.
신채호에게는 이 세 가지가 모두 들어 있었다. 초기에는 영웅 서사와 실증적 사료 발굴에 집중했고, 중기에는 현재의 인식이 과거를 재구성한다는 상대주의적 통찰을 보여줬으며, 후기에는 민중의 구조적 힘에 주목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아(我)와 비아(非我): 역사는 투쟁이다
신채호 사상의 핵심 축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 『조선상고사』에서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역사란 무엇인가? 인류사회의 아와 비아의 투쟁이 시간부터 전개되어 공간까지 확대되는 심적 활동의 기록이다."
여기서 '아'는 단순히 나 자신이 아니다. 자각하고 자신의 특수성을 유지하는 주체적 존재다. '비아'는 그 주체성을 부정하려는 모든 것이다. 아는 비아가 존재할 때 비로소 자기 정체성이 분명해진다.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가 정립되는 것이다.
신채호에게 아와 비아의 투쟁에서 패배하거나 자기 정신을 잃어버리면, 그 존재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 이것은 추상적 경고가 아니었다. 조선이 실제로 겪고 있는 현실이었다.

민족에서 민중으로, 영웅에서 소영웅으로
신채호의 사상은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초기에 그는 토마스 칼라일의 영웅 숭배론에 영향을 받아 을지문덕전을 썼다. 영웅이 필요했던 이유는 분명했다. 현실이 절망적일 때, 사람들에게는 "저런 존재가 우리에게도 있었다"는 점 하나가 필요했다. 그 점의 면적이 존재론을 바꾸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채호는 곧 의문을 품었다.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도 결국 위계/지배(hierarchy)를 만드는 것 아닌가? 일제의 천황제가 지배의 꼭대기에 천황을 놓아 국가를 결속시킨 것처럼, 민족주의도 결국 위에서 아래로 끌고 가는 체제를 만들 수 있다.
이 깨달음이 신채호를 아나키즘으로 이끌었다. 아나키즘의 본래 뜻은 '무정부주의'가 아니라 **'무지배주의'**다. 그리스어 '아르코스(archon, 지배자)'에 반대한다는 뜻이다. 누군가의 강압에 의해 지배받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사상이다.
결정적 전환점은 3.1운동이었다. 수만 명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거리로 나갔다. 누가 주도하지도 않았다. 신채호는 여기서 민중의 힘을 발견했다. 영웅 한 명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주체를 가진 '소영웅'**이라는 인식. BTS의 '소우주'처럼, 모든 사람이 하나의 우주라는 것이다.

크로포트킨과 상호부조: 경쟁이 아니라 협력이 진화의 동력이다
신채호가 수용한 아나키즘은 크로포트킨의 아나코 코뮤니즘에 가까웠다. 크로포트킨은 『빵의 쟁취』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누구나 노동의 대가와 상관없이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물자를 보장받아야 한다. 배고픔을 무기로 인간을 노동으로 내모는 행위는 노예제에 다름없다."
핵심은 상호부조였다. 사회진화론이 약육강식과 경쟁을 자연의 법칙이라 주장했다면, 크로포트킨은 실제 과학적 관찰을 통해 협력이 진화의 진짜 동력임을 증명했다. 전 역사를 돌아보면 협력에 의해 발전한 사례는 무수히 많지만, 경쟁만으로 발전한 것은 거의 다 망했다.
신채호는 이 논리를 받아들여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사회진화론에 맞섰다. 서로 돕는 상호부조야말로 인간 사회의 근본 원리라는 것이 아나키스트들의 반론이었다.
파괴를 통한 창조: 조선혁명선언
아나키스트로 전환한 신채호는 기존의 독립운동 방식에 회의를 느꼈다. 임시정부가 국가를 세우려 하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지배구조를 만드는 일이 아닌가. 그는 의열단의 김원봉과 연결되며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했다.
아나키스트들의 핵심 명제는 **'파괴를 통한 창조'**였다. 기존의 부조리가 해결되지 않으면 새로운 세상은 오지 않는다. 부조리가 파괴되어야만 새로운 가치가 등장한다. 신채호는 26세에 성균관 박사를 받은 엘리트였지만, 그 안락함을 벗어던지고 머리를 자르며 투사의 길을 택했다.
그리고 1936년, 57세의 나이로 뤼순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기록한 역사는 남았다. 3.1운동의 기억이 1987년 6월항쟁이 되었고, 5.18이 되었고, 2025년 빛의 혁명이 되었다. 역사의 시간은 현재에 투사되어 미래를 밝힌다. 라인하르트 코젤렉이 말한 '시간의 층'이 바로 이것이다.
나가며
신채호는 결국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우리의 존재론 밑바닥에 무엇이 깔려 있는가. 을지문덕과 이순신이 깔려 있으면 우리는 독립적이고 창의적인 존재가 된다. 이완용과 민비가 깔려 있으면 우리는 굽신거리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역사를 쓰는 것이 곧 투쟁이었다. 역사학자만 역사를 써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제국대학이 만들어 놓은 분과 학문의 환상이었다. 지금 이 순간, 2026년 아침 8시에 모여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도 역사를 쓰고 있다. 백 년 후 누군가가 이 기록을 보며 생각할 것이다. "그때 사람들도 이렇게 모여서 세상을 바꾸려 했구나."
다음 시간에는 신남철을 통해 1970년대까지의 북한 사상과 철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살펴본다. 김일성 철학부터 박치우, 박종홍, 함석헌까지 — 한국현대철학의 또 다른 갈래가 펼쳐진다.
함께 나눈 생각들
이 철학자가 고민하는 문제는? — 빼앗긴 주권, 교체된 존재론
대원들은 신채호의 문제의식을 '외세에 의한 사고 체계의 교체'로 읽어냈다. 한 대원은 "나와 우리의 것 — 주권, 영토, 정신, 역사 — 이 타인들에 의해 변형되고 왜곡되는 것, 그리고 나라를 운영하던 기득권이 앞장서서 그 일을 실행하는 것"이 핵심 문제라고 짚었다. 또 다른 시각에서는 민족해방에서 민중해방으로의 전환, 즉 NL에서 PD로의 이동에 주목하며 "결국에는 민중의 역량이 통일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신채호의 신뢰를 읽어냈다.
"사람들의 인식 안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더 나은 민족이 있다'라는 시대적 고정관념이 크게 작용했다."
나라를 빼앗긴 원인을 외부의 힘이 아니라 내부의 인식에서 찾은 것이다. 이는 발제에서 다룬 존재론의 아이스버그 모형과 정확히 맞닿는다. 존재론이 바뀌면 원리가 바뀌고, 원리가 바뀌면 행동이 바뀐다. 신채호가 역사 쓰기에 집착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 철학자가 생각하는 대안은? — 스스로 쓰고, 스스로 증명하라
대원들은 신채호의 대안을 크게 두 갈래로 정리했다. 하나는 자기 서사의 회복이다. "조선인이 스스로 조선 역사를 집필하고, 언론출판을 통해 공유하며, 투쟁단체에 직접 참여"하는 것. 다른 하나는 민중 중심의 구조 전환이다. 특정 한 사람이 아닌 민중이 중심이 되고, 함께 협력할 때 해내지 못할 일이 없으며, 지금의 인식을 제대로 기록해놔야 후세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
흥미로운 적용도 나왔다. 소수의 투자자에 의해 수동적으로 평가당하는 기업가치 시장에 대해, 한 대원은 "창업하는 모두가 스스로의 비전 선포, 노력 과정, 결과 데이터를 공개함으로써 스스로의 가치를 선언하는 구조"를 제안했다. 신채호의 '아(我)의 자기 정립'을 현대 비즈니스에 접목한 시도였다.
"고정되지 않은 나 = 관계가 변화할 수 있는 우리 = 스스로를 계속 고민하고 증명하면서, 깨어 있어야 한다."
민중이 주체성을 갖기 위해서 어떤 가치가 필요한가?
이번 회차의 핵심 질문에 대해서는 '자각' 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했다. 아(我)란 무엇인가에 대한 자각, 비아(非我)란 무엇인가에 대한 자각, 그리고 그 둘의 관계에서 생기는 부정적 영향에 대한 자각.
한편에서는 "비아의 질서에 나를 끼워 맞추려 애쓰거나 타인의 기준에 의해 평가당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나를 정의하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있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시스템은 위에서부터 형성된 것이 아니라 아래서부터 형성된 것"이라는 통찰이 나왔다. 종교라는 일상의 실천 행위가 주체성을 갖는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관점도 제시되었다.
가장 구체적인 답변은 세 가지 인식으로 정리되었다. 이 공동체의 주인이 '나'라는 '우리'라는 인식, 경쟁이 아닌 협력을 통해 우리를 지킬 수 있다는 인식, 그리고 상상계와 실재계가 만날 때 변혁의 트리거가 된다는 인식. 이 인식 위에서 "가장 작은 단위의 일부터 실천하기 — 우리의 문제 함께 고민하기"가 주체성의 출발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런 인식과 행동이 있어야만 우리가 위험에 처했어도 다시 회복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연탐대장의 단상노트
우리 안에 무엇을 전제하고 있었는가. 이번 주 신채호 선생의 민중중심사상을 살펴보며 지금 우리 안에 어떤 전제가 있는가에 대해 돌아볼 수 있었어요. 그리고, 그 안에는 우리가 바라보는 문제의 고통에 공감하며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이 반드시 전제되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신채호 선생은 우리 민족에게 어떤 '아'를 가져야하는지를 잊지 않게 하기 위해 기록을 하고, 역사를 만든게 아니였을까요? 아마도 우리는 우리만의, 우리 현장의 역사를 만들기 위해 철학산책을 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밖의 사상을 충분히 본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의 렌즈'가 무엇인지 질문할 수 있게 되는 것. 우리들이 신채호의 아와 비아를 자기 연구 문제에 즉시 적용하는 걸 보면서, 이게 바로 신채호가 말한 '소영웅'의 모습이죠. 거창한 혁명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문제를 자기 언어로 정의하는 것. 연구탐사대가 계속 해야 할 일이 바로 이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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