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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10 함석헌의 씨알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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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10 함석헌의 씨알사상

한국현대철학 시즌6의 도착점에서 만난 마지막 알맹이


마지막에야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도착했다

지난 토요일, 1월부터 넉 달간 이어진 시즌6의 마지막 모임을 했습니다. 영미, 프랑스, 독일, 중국 철학을 거쳐 마침내 한국현대철학에 닿았습니다. 사실 이 도착을 위해 시즌1부터 먼 길을 돌아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사회문제를 연구하는 우리에게 가장 생동감 있는 연구의 장은 한국 근현대였으니까요.

10회차의 첫 질문은 의외였습니다. "살면서 가장 추웠던 때는 언제였나요?" 함석헌이 즐겨 쓴 퀘이커스 퀘스천(Quaker's Question) 네 가지 중 하나입니다. 가장 추웠던 때, 가장 따뜻했던 때, 열 살 때까지의 기억, 앞으로 십 년의 계획. 이 네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 비로소 당신은 우리 공동체의 일원이 됩니다.

한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그 사회가 무엇을 고통으로 보는지에 달려 있다고 한병철(고통없는 사회, 2021)은 말했습니다. 우리 시대의 고통은 무엇일까요. 대원들의 답은 세대갈등, 혐오, 소통의 부재, 외면이었습니다. 모두 관계가 깨진 자리에서 솟는 고통이지요. 함석헌은 바로 이 자리에서 한국 민족의 정체성을 발견했습니다.

평양 용천에서 영국까지, 한 시대를 걸어간 사람

함석헌은 1901년 평안북도 용천의 한의사 집안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압록강이 가까운, 결코 풍족하지 않은 땅이었습니다. 그의 운명을 바꾼 사건은 오산학교 입학이었다고 합니다. 거기서 그의 스승, 유영모를 만납니다. 씨알사상의 뿌리는 유영모에게서 시작하게 되었죠.

동경 유학길에서는 우치무라 간조의 무교회 신앙을 배웠습니다. 교회 건물이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 자체가 교회라는 사상입니다. 김교신과 함께 교회를 벗어나 이 사상을 민족으로 확장합니다. 1963년 영국 퀘이커교도들의 초청을 받아 영국으로 갔고, 그 시기에 안병무를 만났습니다. 거기서 민중신학과 씨알사상이 사실상 한 뿌리였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1970년 4월, 「씨알의 소리」가 창간됩니다. 원고료를 줄 돈이 없어 처음에는 1인 잡지로 시작했지만, 군사정권에게 그의 글은 어떤 시위대보다 두려운 존재였다고 해요. 폐간과 13개월의 법정 투쟁 끝에 복간, 이후 장준하를 비롯한 11명의 재야 인사가 편집위원으로 합류합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회식의 굴렁쇠 어린이를 기억하시나요? 텅 빈 운동장에서 아이 하나가 굴렁쇠를 굴리던 그 장면.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아이디어로 진행했던 그 오프닝은 오대양이 하나로 만나는 여백, 그 모습 자체가 그의 한국역사관이었습니다. 1989년 별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국민장으로 그의 한 시대가 닫힙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알맹이라는 사건

씨알은 씨와 알의 결합어입니다. 곧 껍질을 벗긴 알맹이지요.

함석헌의 출발점은 요한복음의 첫 문장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헬레니즘 문화에서 로고스는 이성, 진리, 뜻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 로고스가 사람의 몸으로 들어와 사람이 되었다는 선언입니다.

함석헌은 사도신경이 성경의 핵심을 모은 '경(經)'이듯, '뜻'으로 한국역사 전체를 다시 봐야 한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책 제목이 「뜻으로 본 한국역사」입니다. 그러면 말씀을 들은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말이 우리 안에서 우리가 됩니다. 십 분 전의 우리와 십 분 후의 우리는 다르지요. 말씀이 육화된 존재, 곧 메시아입니다.

안병무 선생은 어디서 메시아를 봤을까요. 어머니의 뒷모습이었다고 합니다. 왜 부모는, 특히 어머니는 나를 위해 저렇게 희생할까. 이해되지 않는 그 뒷모습에서 예수가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곧 노동자, 농민, 일반 시민들에게서 메시아의 그림이 보였습니다. 민중신학의 핵심은 "민중이 중요하다"가 아닙니다. 민중이 곧 예수다, 그게 핵심입니다.

위에서 내려오는 권능을 거부하는 자리

함석헌은 베르그송을 빌려 인간을 설명합니다.

물질의 파동과 관념의 파동이 만나는 자리에 생명적 의식이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씨알이 위에서 내려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래로부터, 실제계로부터, 물질로부터 자라납니다. 처음에는 몸으로 태어나 의식이 없지만 점점 의식이 생기고 인지구조가 만들어지면서 정신이 형성되지요. 끊임없이 생각하지 않으면 다시 물질 속으로 가라앉습니다.

이 구조는 결정적입니다. 일제, 군사정권, 자본주의는 모두 같은 모양이거든요. 위에서 내려오는 권능을 정당화하는 위계, 곧 하이어라키(hierarchy). 헤겔의 변증법조차 위로 올라가는 사다리였고, 그래서 히틀러와 독재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고 함석헌은 봤습니다.

5.16에 대한 그의 비판은 흥미롭습니다. 정변 자체를 비판하기 전에, 다른 생명을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생각, 그 생각 자체가 하이어라키(hierachy) 라고 짚었습니다. 그 생각이 마음에 남아 있는 한, 시간 문제일 뿐 결국 다른 씨알을 업신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도 같은 구조입니다. 욕망을 초월하지 못하는 문명, 욕망을 끝없이 추구해도 괜찮다고 말하는 사회. 그래서 함석헌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자본주의를 비판했습니다. 근대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서구가 정의한 컨셉을 다른 곳이 모방하고 추종하게 만드는 폭력. 동양은 동양으로서, 한국은 한국으로서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는 선언이지요.

고통받는 자, 그러나 자기를 부정하는 자

한국 민족의 정체성은 고통 속에서 빚어졌고 봅니다.

고통당한 자, 소외된 자, 위로가 필요한 자, 어려움 당한 사람의 마음을 아는 자. 그게 우리 민족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악을 선으로 이기고, 더 많이 이해해주고, 바로 보복하지 않고, 직접 쳐들어간 적이 없는 민족. 이 결을 그는 한국역사 전체에 흐르는 '뜻'으로 읽었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곧장 선민의식이 자라는 위험이 있습니다. 함석헌의 사상을 따르던 학생운동의 일부가 그랬지요. "우리는 그 어려운 시대 이걸 지켰잖아, 너희는 안 했잖아." 그렇게 위계가 다시 솟아납니다.

함석헌은 알랭 바디우식으로 이 함정을 비틉니다. 플라톤주의는 하나의 이데아 아래 모두를 복제품으로 두고 가장 가까운 자를 위에 놓는 위계입니다. 바디우는 그걸 뒤집어 우리 존재만큼의 이데아가 있다고 봤습니다. 함석헌의 씨알도 같은 자리입니다. 모든 씨알에게 자기만의 이데아가 있고, 더 많이 생각한 사람이 더 씨알스럽다는 말은 함정입니다. 모두가 씨알이고, 모두가 동등하게 발현 중입니다.

그러면 씨알은 어떻게 자라는가. 자기부정을 통해서입니다. 씨앗 그대로 있으면 그저 씨앗이지만, 땅에 묻혀 자기가 죽어야 새로운 존재가 됩니다. 변증법의 정이 부정되어야 반으로 가고, 반이 부정되어야 합으로 가지요. 크리슈나무르티가 말한 "자기로부터의 혁명"입니다. 자기가 처한 상황, 자기가 살아온 생각을 부정하면서 새 영역으로 넘어가는 운동, 그게 씨알혁명입니다.

나가며

철학산책을 이끌어주시는 민경인 파트너 대원님은 마지막에 부르키나파소 아이들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불쌍해서 어떡해"의 시선과 "이 친구들 어마어마한 생명력이다"의 시선은 완전히 다릅니다. 사람이 모두 씨알인지라, 누가 자신을 씨알로 보고 있는지 단번에 압니다. 언어로 치환되기 전에, 실제계에서 압니다.

시즌1부터 영미와 유럽과 중국을 거쳐 우리는 한국현대철학에 도착했습니다. 도착점이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세상은 결국 우리의 렌즈로 봐야 한다는 약속을 다시 새기는 자리니까요. 호롱불 하나가 어두운 골짜기를 지킨다고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 창간호에 적었습니다. 시대를 바꾸는 것은 큰 돈이나 권력이 아니라 호롱불 하나의 기름이라는 선언입니다.

연구탐사대도 그 호롱불 하나의 자리에 서 있다고 믿습니다. 연구탐사대도 씨알의 소리일 수 있다는 경인님의 말처럼, 작은 알맹이가 자라는 모든 자리가 씨알의 소리입니다. 시즌6은 여기서 마무리합니다. 함석헌이 마지막에 남긴 질문 하나만 품고 가시면 좋겠습니다. 주체성을 가진 민중이 태어나기 위해, 고통이 필요할까요.

함께 나눈 생각들

함석헌이 답하려 한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 고통받는 민중과 평화

대원들 사이에서는 함석헌이 평생 응시한 자리를 고통받는 자, 소외된 민중으로 정리하는 시선이 가장 많았습니다. 군사독재와 남북 분단의 한가운데서 사회 변화의 동력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그 물음에 함석헌이 내놓은 답이 바로 씨알이었다는 정리지요. 한편에서는 그 시선을 더 종교적인 차원에서 읽기도 했습니다. 주류에 복종한 종교를 향한 비판, 그리고 대중과 함께 가는 종교의 자리를 다시 묻는 작업이었다는 것이지요.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평화 그 자체를 그가 끝까지 놓지 않은 주제라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절망 속에서 주체성을 잃고 수동화되지 말고, 씨앗으로서 싹을 틔워 저항하자."

대안의 결은 모이는 곳이 분명했습니다. 사람 한 명 한 명이 씨알이고 소우주라는 자각이 출발점이라는 의견이 가장 많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씨알임을 알고 살아갈 때 시련을 통과할 때마다 다시 단단해질 수 있고, 불의에 저항하며 우리의 평화를 주체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정리도 있었지요. 그 자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곧 고난의 의미를 함께 깨닫는 작업이라는 점도 짚였습니다. 억압하려는 모든 권력에 대한 함석헌의 비판은 결국 이 자각을 막는 모든 것을 향한 것이었다는 시선입니다.

함석헌의 사상을 우리의 문제에 적용한다면 — 모두를 씨알로 본다는 것

대원들은 자기 연구주제에 씨알을 각자 다르게 적용했습니다.

"시민 한 명 한 명이 '지식인'이 될 수 있다면. 시민을 넘어 지민(知民)으로서 지식민주주의가 구현될 수 있다면."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연구하는 우리에게 씨알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옮겨질 수 있을지를 묻는 시선이었습니다. 사회의 고통 가운데에서 모두가 연구하고, 모두가 사유해서 지식을 생산하고 대안을 시도할 수 있는 사회를 그려보자는 제안입니다. 모두를 온전히 믿을 때 비로소 우리의 행동이 달라진다는 정리도 같은 맥락에서 읽혔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지식을 만들어낼 가능성, 현장에서 분투하는 이들의 가능성, 미래세대에 대한 가능성을 한 줄로 꿰는 단어가 결국 씨알이라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통일과 분단의 자리에서 씨알을 다시 읽는 시선도 있었습니다. 남과 북의 민중이 모두 씨알이라는 자각이 통일 담론의 출발점이 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종교 공동체의 자기 정체성을 묻기도 했습니다. 교회가 교회와 교인들을 잘 돌보는 것이 우선인지, 모든 사람을 지향해야 하는지, 그 오래된 물음이 씨알을 만나면서 다시 새롭게 던져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주체성을 가진 민중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위기가 필요할까

이번 회차의 메인 질문이었습니다. 답은 한 방향으로 모이지 않았습니다.

위기가 각성의 조건이라는 시선이 가장 강하게 나왔습니다. 관성적으로 본능을 따라가는 삶으로 미끄러지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라면, 그것을 역행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투쟁이 필요하다는 정리였지요. 그리고 그 투쟁은 위기의 때에 가장 활발하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위기를 통해 성찰하게 되고, 이를 통해 자신 안에 있는 진짜 '자신됨(알)'을 발견하게 된다. 모든 위기가 각성을 만들어주진 않지만, 위기 없이는 각성이 일어나지 못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그 명제 자체에 멈춰선 시선도 있었습니다. 고난이 사람을 단단하게 만든다고 흔히 말하지만, 그게 정말 성숙일까. 단지 말랑한 부분이 상실된 것 아닐까. 뼈가 드러나 아파하는 것이 좋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솔직한 고백이 따라왔습니다. 결론은 위기는 없어도 된다, 다만 위기가 왔을 때 잘 넘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자리였지요.

또 한편에서는 우리는 매일 위기이고 고통이다, 강도만 다를 뿐이라는 시선이 있었습니다. 위기가 따로 오는 게 아니라 우리 삶의 결 자체에 늘 흐르고 있다는 자각이지요. 신앙의 자리에서 같은 질문을 던지는 시선도 있었는데, 모든 순간에 주체성을 갖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그 물음 안에 위기라는 단어가 어떻게 들어와야 하는지를 다시 묻는 작업이었습니다.

함께 더 나누고 싶은 질문

토론을 마치고 남은 질문들이 두 갈래로 정리되었습니다.

먼저 씨알의 자리에서 통일을 어떻게 다시 그릴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 있었습니다. 또 다른 통일의 반대 세력으로 미국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함께 짚는 시선이었지요. 함석헌의 한반도 시각이 오늘날 동아시아 정세의 한복판에서 어떻게 다시 읽힐 수 있을지를 가늠해보는 질문입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종교 공동체의 실천 영역으로 질문이 향했습니다.

"기존의 선 안에서 퀘이커교와 씨알을 적용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함석헌이 영국 퀘이커교도들과 만나면서 씨알사상을 세계 사상으로 확장했던 그 자리를, 오늘 우리의 일상 속에서 어떻게 재현할 수 있을지를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시즌6의 마지막 자리에서 시즌1의 출발점으로 돌아갈 수 있는 좋은 다리가 되는 질문들이었지요.

연탐대장의 단상노트

시즌6의 마지막 회차에 드디어 도착했어요! 거칠게 말하면 시즌1부터 영미, 프랑스, 독일, 중국 철학을 거쳐온 모든 길이 이 자리, 우리의 언어로 우리를 다시 말해보려는 한국현대철학의 마지막 페이지로 모이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이번 함석헌 회차에서 가장 묵직했던 한 줄은 "더 많이 생각한 사람이 더 씨알스럽다는 말은 함정" 이라는 경인님의 정리였어요. 연구를 하다보면 더 많은 시간을 고민하고 다양한 사료들을 읽게 되며 자연스럽게 상대적으로 더 많은 지식을 접하게 되죠. 많은 연구자들이 이 부분에 대한 것을 인정받고, 많은 자리에서 스피커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스피커로서 권한이 부여되었다고, 더 중요한 역할인게 아니였는데, 거기서 '위계'가 생기는 게 아닌데 우리 안에서는 '지식접근'의 유무로 새로운 하이어라키(Hierrachy)가 생겼다라는 것을 봅니다.이 환경에서 연구자들은 현장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가볍게 여겼던 게 아니었을 까요.

사회문제를 연구하는 우리들에게 모두가 씨알이고, 모두가 같다 라는 전제는 문제를 풀어가는 연구를 할 때 있어ㅇ우리의 태도를 잡아주는 정말 중요한 전제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모두를 씨알로 본다는 자리에 서기 위해, 다음 시즌은 이 자각에서 출발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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