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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도,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겠습니다.

2024년 하반기 연구원정 부트캠프에서 기후재정, 디지털 성범죄, 전세사기를 연구할 특별연구그룹을 모집합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 The owl of Minerva spreads its wings only with the coming of the dusk
안녕하세요. 연구탐사대 운영진인 나이오트입니다.
이번 연구원정 부트캠프 9월 모집에 앞서 한 가지 공지 겸 마음을 전하기 위해 글을 씁니다. 다소 무거운 이야기이기도 하고 동시에 저희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기에 더욱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펜을 들어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연구탐사대의 가장 첫 시작은 사실 2020년 4월에 시작된 ‘프로젝트 함트XAMT’라는 비영리 프로젝트입니다. 2019년 11월, ‘청년 연구자 플랫폼 제안’이라는 이름으로 나이오트의 파운더가 사회문제해결을 위한 연구 플랫폼 기획안을 완성한 이후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을 때에 2020년 3월,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이 공론화되었습니다. 단 한번도 마주한 적 없는 형태의 잔혹한 범죄 앞에서 많은 이들이 분노하고 분개하면서 동시에 느낀 감정은 ‘무력감’이었습니다. 어떻게 문제를 풀어야 할 지, 그 원인은 무엇이고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
이 무력감에 맞서 싸우기 위해 기획한 것이 연구 플랫폼이었고, 여성혐오로 표현되었던 관련범죄가 디지털 성범죄의 형태로 변이된 이 상황에서 만일 연구 플랫폼을 실제로 시도해보지 않는다면 지금껏 플랫폼을 기획한 수년의 시간들이 무의미해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팀을 꾸렸고, ‘문제정의활동에 기반한 문제해결해커톤’을 기획해보자는 마음으로 프로젝트 함트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연구 밖에 해본 적이 없는 대표와 한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일을 실행하면서 마주하는 시행착오 앞에서 저희는 너무 취약했고, 몇개월이 채 되지 않아 프로젝트는 무산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프로젝트의 정신만은 남아 이후 창업으로 이어졌고 지금의 나이오트와 연구탐사대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조주빈이 잡히고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이 잠잠해진 후에도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문제의 실체와 구조, 원인에 대해서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요. 언제든 문제는 재발될 수 있었고 또 변이될 수 있었습니다. 이를 제대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의 구조와 원인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가 필요했고, 그런 연구자들을 모으고 또 연구하기 위해 연구원정 부트캠프를 부지런히 개발했고 밤낮없이 활동해왔습니다.
하지만 정작 지난 서울대 딥페이크 유포 사건에 이어 이번 딥페이크 음란물 유포 사건이 터졌을 때 정말 많이 좌절했습니다. 이렇게 될 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이에 대한 연구와 기록, 정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많은 곳에 주장해왔던 저희였지만 막상 정말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이 딥페이크 음란물 유포 사건으로 변이되는 동안 저희가 연구의 측면에서 해온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여전히 문제는 미궁 속에 갇혀 있고, 문제의 양상은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해져가고 피해규모도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고 있었습니다. 왜 알면서도 그런 연구자들을 모으지 못했는지, 연구자들과 함께 연구하지 못했는지 많이 자책하기도 했습니다. 사회문제해결형 연구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지만 정작 재발 변이된 문제 앞에서 저희 또한 무력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동시에 지난 8월 28일, 전세사기특별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습니다. 사실 처음 빌라왕 사건이 발생했을 때부터 함께 분개했고 또 무엇을 도와야 할 지 고민했지만 주저해왔었습니다. 물론 다행히도 전세사기특별법이 통과되었지만 이 또한 이미 벌어진 사건에 대한 피해자들에 대한 응급대책일 뿐, 여전히 부동산 문제와 전세제도에 대한 문제는 시한폭탄과 같이 한국 사회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특별법이 통과되었다는 이유로, 직접적인 나의 문제가 아니라는 이유로 다시 이 이슈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있습니다.
지난 8월 29일에 아시아 최초로 일부 승소한 기후소송은 어떨까요. 헌법재판소는 2031년 이후의 장기적인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 목표를 전혀 제시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탄소중립기본법에 대한 위헌 판결을 내렸지만, 2030년까지의 중장기 목표에 대해서는 기각 판결을 내린 상황입니다. 무엇보다, 그렇다면 우리가 2030년까지, 더 나아가 앞으로 사회 전반을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사회로 구성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정부 차원의 대응과 지원, 또 제재를 해야 하는지. 사회적 합의와 약속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우리는 정리를 시작해야 합니다. 이미 시작된 기후재난을 한해한해 견뎌내면서라도 우리는 대안을 모색해야 하지만 그것을 정부에만 맡기거나 가만히 바라보고 있기에 우리는 너무도 무력합니다.
그저 주저앉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어서 지금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고자 합니다. 이번 9월에 모집하는 연구원정 부트캠프에서 기후재정, 디지털성범죄, 전세사기를 주제로 한 이슈연구그룹을 모집합니다. 황혼이 저물어야 날개짓을 시작한다는 미네르바의 부엉이처럼, 이슈가 사그라들더라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때까지 연구를 계속해서 지속하고자 하는 마음에 Minerva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기후재정, 디지털 성범죄, 전세사기 문제에 대한 구조적, 제도적, 공동체적 원인을 정리하고 대안을 연구하고 모색하고자 하는 분들이라면 이 그룹에 함께 해주세요. 저희가 수 년동안 검증해 온 연구훈련 프로세스를 통해 여러분의 진심을 지식으로 만들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연구원정 부트캠프가 사회문제 솔루션을 만드는 최적의 대안이어서가 아닙니다. 저희도 고작 4년차 스타트업에 불과하고 연구원정 부트캠프 또한 연구계획서 작성까지만 개발되어 있는 설익은 프로그램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희 프로그램이 보다 검증된 이후에, 보다 안정화된 이후에 연구를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을거라 생각합니다. 지금 당장 저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통해 해야 하는 일을 해보려고 합니다.
지금 당장 문제가 심각한데, 한가하게 연구나 하고 있을 것이냐. 그것도 기연구자들이 아니라 예비연구자들을 언제 훈련시킨다는 것이냐라고 생각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연구원정 부트캠프를 운영하면서 깨달은 것은, 먼저는 사회문제의 구조적 요인과 원인을 연구해서 기록하고 지식으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사회문제를 가장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정말 제대로 뾰족하게 문제에 대해 깊이 있게 연구한다면 우리는 분명 가장 적실한 해결책을 대중들을 설득할 수 있는 수준으로 연구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동시에 저희는 당장의 연구 전문성 이상으로 문제에 대해 깊이 공감하는 ‘진심’이 가장 적실한 연구를 만들어내는 코어라고 믿습니다. 당연히 디지털 성범죄에 대해 오래 연구해오신 연구자분들이 함께 구조적 원인에 대한 연구를 수행해나가시는 것도 너무 중요합니다. 하지만 저희는 연구원정 부트캠프를 진행하면서 문제의 당사자 혹은 문제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함께 아파하던 분들이 직접 정하시는 연구주제의 적실성과 깊이는 기연구자분들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너무 필요한 영역임을 절실히 깨달아왔습니다. 문제의 본질이 무엇이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직감적으로 이해하고 계신 분들에게 연구하는 방법을 알려드리고 연구할 수 있는 인프라와 공동체를 만들어드리는 것이야말로 문제를 제대로 연구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임을 저희는 확신합니다.
마치 지구 멸망의 날에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는 것과 같아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지난 2020년의 텔레그램 n번방 사건으로부터 4년여가 지난 지금 문제가 어디까지 변이되고 피해범위가 어디까지 확대되었는지를 마주할 때에, 저희는 이 싸움이 결코 한두 사건의 해결로 끝나거나 한두 법안의 통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인지합니다. 디지털 성범죄를 필두로 디지털 플랫폼의 규제와 디지털 환경에 대한 법적 지위의 논쟁, 여기에 젠더 이슈와 성범죄에 대한 사회적 대응까지 연결되어 있는 복합적인 문제가 될 것이고, 전세사기 사건 또한 우리나라의 부동산 산업과 대출규제, 주거권 논쟁이 뒤섞인 가운데 그 속에 응축되어 온 욕망과 질서의 각축전을 드러낸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글로벌 이슈인 동시에 산업 전반의 전환과 정부의 방향성 자체를 근본부터 재논의해야 하는 기후재정 이슈 또한 마찬가지이죠. 이 문제들이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변이될 지 짐작조차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당장의 사건에 대한 연구 이상으로 연구를 계속 수행할 수 있는 연구공동체의 조성과 연구자 양성이 함께 가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저희도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겠습니다. 이번 부트캠프를 시작으로 기후재정, 디지털 성범죄, 전세사기 문제의 해결을 위해 연구하는 연구자와 연구공동체가 키워질 수 있도록 지원하겠습니다. 동시에 멘토 역할을 해주실 기연구자분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함께 머리를 맞대어 연구하고 또 연구에 도움을 주실 연구자분들도 저희에게 연락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또한 동시에 연구에도 재원이 필요합니다. 연구자들에게 연구비를 지원해주실 분들이 있으시다면 연락주시면 관련해서 기획들을 빠르게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혹 ‘이렇게 심각한 이슈에 대해 유행 타듯이 가볍게 대응하는가’라는 불편한 마음이 드시는 분이 있으시다면 먼저 사과드립니다. 그러한 오해가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안의 심각성을 비추어볼 때에 꼭 필요한 일이라 생각되어 염치불구하고 모집을 진행합니다. 동시에 저희는 연구그룹과 공동체 유지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연구훈련과 연구 코디네이션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영리기업입니다. 공익적 목적을 제대로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지속가능성이 필요하다 판단하기에 저희는 비용을 받습니다. 다만 지속가능성 이상의 영리를 취하기보다 가장 효과적인 연구공동체의 조성과 연구수행에 제1순위를 두고 재정을 운영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연구탐사대의 미션이자 약속이니깐요.
보다 자세한 모집내용은 2024년 연구원정 부트캠프 하반기 대원 모집 페이지에 공개되어 있습니다. 이외의 문의나 제언, 협업문의 등은 연구탐사대 DM이나 카카오톡채널을 통해 전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회운동 단체의 일을 열심히 돕던 한 학부생이 내 연구실에서 석사를 하고 싶다고 찾아온 적이 있다. 왜 공부를 하고자 하는지 물었다. “세상을 더 평등한 곳으로 만들고 싶어서요.” 학생에게 그런 목적이라면 대학원 공부를 권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공부는 공부인 것이라고. 논문을 쓰다 보면, 일반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다지 놀랍지 않은 상식에 가까운 결론을 확인하기 위해 수많은 문헌을 읽고 정리하고 데이터 분석을 하는 일을 반복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고도 우리가 가 닿는 자리에는 종종 불확실성이 섞여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논리적 엄밀성을 추구하는 학계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보수적이라고, 그래서 종종 급격하게 변화하는 현실을 사후적으로 분석하는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고, 그조차도 온전히 해내는 게 쉽지 않다고 답했다. 학생은 되물었다. “그럼 교수님은 왜 공부를 하시는 건가요?” 나는 할 줄 아는 게 이거 하나였다고. 그리고 공부가 가진 힘을 믿는다고, 공부가 당장의 사회 변화를 만들어 내지는 못하고 속 시원한 말로 사람들의 갈증을 해소해 주지는 못하지만 인류가 유사한 문제를 두고서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며 오랫동안 쌓아 온 지식을 면밀히 검토하면서 얻게 되는 통찰이 있다고. 그 통찰의 힘이 장기적으로는 우리가 가장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길잡이가 되어 준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김승섭 씀 중, Diversitas 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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