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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면서도 무시당하는 사람들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철학산책›철학산책 시즌7

가난하면서도 무시당하는 사람들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철학산책 시즌7 열 번째 산책 · 서유석 「낸시 프레이저의 '재분배'와 '인정'의 통합」, 『처음 읽는 영미현대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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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자 한 판 앞에서 정의를 묻다

우리 앞에 피자가 한 판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일곱 명이 함께 먹을 참이에요. 이 상황에서 무엇을 먼저 해야 할까요. 누군가는 "일곱 등분으로 똑같이 나누자"고 말할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먼저 우리가 서로 누구인지 알아가자"고 말할 것입니다. 피자를 공평하게 나누는 일이 먼저일까요, 아니면 함께 앉은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일이 먼저일까요.

지난 삼십 년 동안 정의를 둘러싼 논쟁은 이 두 요구 사이에서 팽팽하게 맞서 왔습니다. 한쪽에서는 빈자와 노동자에게 부를 정의롭게 나눠야 한다고 외쳤고 다른 쪽에서는 성소수자와 여성, 장애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했어요. 재분배냐 인정이냐. 이 물음이 오늘 만나는 낸시 프레이저의 출발점입니다. 프레이저는 이 이분법 자체가 문제라고 봤어요. 둘 중 하나만 고르면, 가난하면서 동시에 무시당하는 사람처럼 두 문제를 함께 겪는 이들의 자리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낸시 프레이저는 누구인가

낸시 프레이저는 1947년에 태어나 뉴욕 뉴스쿨에서 정치학과 철학을 가르쳐 온 학자입니다. 뉴스쿨은 한나 아렌트가 생을 마치기까지 강단에 섰던 곳이고 좌파 민주주의의 본산으로 알려져 있어요. 프레이저의 관심사는 정의론, 특히 페미니즘과 정의론을 하나의 이론 틀로 엮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는 프레이저를 좌파라 부르고 누구는 페미니스트라, 또 누구는 정치철학자라 불러요.

프레이저는 별자리라는 뜻의 학술지 『컨스텔레이션스(Constellations)』를 공동 편집하기도 했어요. 프레이저는 정의를 분배의 문제로만 보지도, 정체성 인정의 문제로만 보지도 않습니다. 분배와 인정과 대표, 이 세 차원을 함께 봐야 한다고 주장해요.

인정의 정치가 도착한 자리

재분배에서 인정으로. 지난 삼십 년 사이에 정의론의 관심 축이 옮겨갔습니다. 냉전이 끝나고 정체성 정치가 부상했어요. "나를 나로 인정해 달라"는 요구가 "부를 정의롭게 나눠 달라"는 요구를 밀어내는 듯 보였죠. 프레이저는 이 이동이 양날을 가졌다고 진단합니다. 무시당하던 집단이 목소리를 낸 것은 분명한 진전이지만 그 과정에서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오래된 문제가 시야에서 사라졌어요.

피자 비유를 한 걸음 더 밀고 가 볼게요. 만약 누군가가 "이 피자는 내가 샀다"고 나선다면 어떻게 될까요. 일곱 등분이냐 통성명이냐 하던 논쟁이 한순간에 무의미해집니다. 피자를 산 사람이 권력자가 되고 나머지는 그의 결정에 따라야 하니까요. 누가 피자를 사는지, 곧 자본주의라는 구조가 그대로인 채 정체성만 인정받으면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프레이저가 경고하는 지점이 여기예요. 존중한다는 말은 들어도,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집의 형편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정체성 모델의 함정

정체성 정치의 뿌리는 헤겔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헤겔은 인정을 주체들 사이의 이상적인 상호관계로 보았어요. 가족 안에서 부모가 아이를 무한정하게 사랑하는 것, 그것이 인륜성의 기반이라고 했죠. 문제는 이 인정을 누가 주느냐입니다. 헤겔에게 그것은 국가였어요. 국가가 주민등록을 부여하듯 정체성을 부여합니다. 프레이저는 바로 이 지점을 비판해요. 국가나 가부장이 정체성을 정해 주는 순간, 그 집단은 정체성을 정해 준 쪽에 종속되어 버립니다.

여성가족부라는 이름을 생각해 보세요. 여성 문제를 다루는 부처라는 지위를 주긴 했습니다. 그런데 '여성'을 '가족'과 묶는 순간, 여성은 가장의 지배 아래 놓인 존재로 정의되어 버려요. 구성원 각자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어지죠. 이것이 물화입니다. 한 사람을 그가 속한 집단의 n분의 1로만 보는 것, 그 안의 개별성을 지워버리는 것. 집단 정체성을 인정해 달라는 운동이 도리어 그 집단을 가두기도 합니다. 정체성 모델의 역설이에요.

문화적 정체성의 물화 문제를 정리한 발제 장표. 반대가 불충이 되고, 집단 내부의 차이가 지워지고, 인정이 도리어 무시가 되는 세 경로를 보여 준다
문화적 정체성의 물화 문제를 정리한 발제 장표. 반대가 불충이 되고, 집단 내부의 차이가 지워지고, 인정이 도리어 무시가 되는 세 경로를 보여 준다

지위 모델이라는 대안

프레이저는 정체성 모델 대신 지위 모델을 제안합니다. 집단 고유의 문화적 정체성이 아니라, 사회적 상호작용에 온전히 참여할 지위를 인정해 달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포지션을, 자리를 달라는 거예요. 그러면 무시의 뜻도 달라집니다. 무시당한다는 것은 집단 정체성이 왜곡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사회에 동등하게 참여하는 길이 막혔다는 뜻이 돼요.

정체성 모델과 지위 모델을 다섯 줄로 대비한 발제 장표. 인정 대상, 무시의 뜻, 문제의 자리, 해결 방향, 종착점이 각각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여 준다
정체성 모델과 지위 모델을 다섯 줄로 대비한 발제 장표. 인정 대상, 무시의 뜻, 문제의 자리, 해결 방향, 종착점이 각각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여 준다

장애인 문제를 예로 들어볼게요. 지하철에서 시위하는 장애인들에게 정치인 한 명이 찾아가 이야기를 들어줬습니다. 시위는 멈췄어요. 그런데 나흘 뒤 다시 시작했습니다. 들어주기만 하고 바뀐 것은 없었으니까요. 호의를 준 것이지 권리를 준 것이 아니었어요. 프레이저라면 이렇게 말할 겁니다. 시위로만 목소리를 내게 두지 말고, 정부 안에 장애인 부서를 만들어 그들의 목소리를 대표할 자리를 주라고요. 지위가 생기면 예산과 인력이 따라오고 그때부터 재분배를 논의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일터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노동조합이 없는 직장을 생각해 보세요. 임금을 협상하는 자리가 아예 없으니 복지가 필요할 때마다 달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어요. "그동안 힘드셨지요"라는 말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노조가 생기면 사정이 다릅니다. 노동법이 보장하는 지위가 생기고 그 지위가 권리가 돼요. 그래서 위로의 말에서 그치지 말고 근로자위원회 같은 자리를 만들어 주는 데까지 가야 합니다. 그리고 자리를 얻었다면 거기서 멈추지 말고 분배의 문제를 다시 다뤄야 해요.

낙타의 코가 들어오는 순간

정책학에서 '낙타의 코 전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막의 밤은 영하로 떨어져요. 낙타가 추위를 피하려고 텐트 안으로 코를 살짝 들이밉니다. 괜찮겠지 싶어 내버려 두면 밤새 조금씩 몸을 밀어 넣어 새벽에는 낙타와 같이 자게 됩니다. 지위도 마찬가지예요. 일단 자리를 내어주면 그 다음부터는 빼앗기 힘들어집니다. 정부 조직법에 따라 청이나 부처가 생기면 최소 백에서 이백 명의 인력이 배치되고 예산이 편성되니까요.

이 사실을 정부 관계자들은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지위를 주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도 프레이저의 논리를 따르면 자리를 만드는 일이야말로 인정과 재분배를 함께 풀 수 있는 길이에요. 이 논리를 우리 현실에 옮겨 보면 이렇습니다. 서울시에는 청년청이 있지만 중앙정부에는 아직 그런 자리가 없어요. 중앙정부 안에 청년 부처가 생긴다면 청년 문제가 풀릴 가능성은 훨씬 높아집니다. "청년들 힘들지요"라는 인정만으로는 달라지는 것이 없지만 자리가 생기면 법령이 따라오고 문화가 바뀌기 때문이에요.

바다 건너에도 비슷한 예가 있습니다. 영국에는 외로움 문제를 맡는 장관이 있어요. 외로움이 하나의 포지션을 얻자 그와 연결된 일에 예산이 붙고 여러 정책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을 위로하는 말보다 외로움을 다루는 자리가 먼저 생긴 셈이에요. 프레이저가 말하는 순서가 바로 이것입니다. 먼저 자리를 잡고, 그 자리에서 분배의 문제와 인정의 문제를 함께 논의하는 것이죠.

참여의 평등이라는 규범

프레이저가 제안하는 정의의 핵심은 참여의 평등입니다. 먼저 참여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그 자리에서 재분배를 논의하고 문화적 인정을 제도화합니다. 영화관을 떠올려 볼게요. 육백 석짜리 상영관에도 장애인 좌석 네 석은 늘 남아 있습니다. 언제든 들어갈 수 있는 그 자리가 곧 지위 모델이에요. 자리를 가진 사람은 참여를 넓히려고 그 좌석을 늘려 달라고 요구할 수 있습니다. 육백 석 가운데 백 석이 장애인석이라고 해 볼게요. 그러면 극장은 시키지 않아도 휠체어가 오를 길과 엘리베이터를 만들 거예요.

운동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지는 거죠. "우리를 인정해 달라"는 정체성 투쟁이 "이 자리를 우리 몫으로 확보하자"는 대표성 투쟁으로 바뀝니다. 정체성 정치가 자칫 내부 갈등과 집단 이기주의를 낳을 수 있다면 지위 모델은 제도를 바꾸는 데 힘을 집중하게 해요. 그래서 프레이저는 정의의 세 차원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경제적 재분배, 문화적 인정, 정치적 대표. 이 셋이 함께 갈 때 정의가 가능합니다.

참여의 평등과 세 조건을 정리한 발제 장표. 객관적 조건인 재분배와 상호주관적 조건인 인정에 정치적 조건인 대표가 더해져 3차원의 정의론으로 확장된다
참여의 평등과 세 조건을 정리한 발제 장표. 객관적 조건인 재분배와 상호주관적 조건인 인정에 정치적 조건인 대표가 더해져 3차원의 정의론으로 확장된다

비판학파의 계보 위에서

프레이저를 이해하려면 프랑크푸르트 비판학파의 흐름을 알아야 합니다. 1세대인 호르크하이머, 마르쿠제, 아도르노는 자본주의가 이성을 도구화했다고 비판했어요. 인간의 이성이 자본을 늘리는 수단으로 전락했습니다. 2세대인 하버마스는 1세대의 비판이 도구적 이성을 고발하는 데서 멈춰, 그 너머의 다른 이성을 보여 주지 못했다고 보았어요. 그래서 의사소통 합리성이라는 새로운 이성을 제안했습니다. 답을 정해놓지 않고 대화를 통해 대안을 만들어 나가자는 것이었죠.

3세대인 악셀 호네트는 하버마스에게도 같은 비판을 던졌습니다. 의사소통을 해서 결국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 아니냐, 그것도 도구적 이성 아니냐고요. 호네트는 인정투쟁의 뿌리를 헤겔의 인륜성, 곧 가족 안의 사랑에서 찾았어요. 사랑으로 서로를 인정하는 데서 권리의 인정이 나오고, 권리의 인정에서 연대가 나온다고 봤죠. 프레이저는 호네트와 긴 논쟁을 벌였습니다. 프레이저가 보기에 호네트의 길을 따라가면 결국 정체성 정치에 갇히게 됩니다.

둘이 싸우면 자본은 웃는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재분배만 말하고 정체성 정치 옹호자들은 인정만 말합니다. 프레이저가 보기에 이 두 진영이 싸우는 동안 정작 자본주의는 아무 손해 없이 굴러갑니다. 두 진영이 서로를 겨누는 사이 일터의 부정의는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자본은 그동안에도 자연과 공공 자원을 값싸게 끌어다 쓰니까요. 갈등선을 조장하는 것이 지배층에게는 가장 쉬운 전략이에요.

정체성 정치가 열을 올릴수록 집단끼리 갈라지고 그 안에서 개인의 인격은 지워집니다. 장애인 시위 현장에서 "우리를 인정해 달라"는 외침만 남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보이지 않게 돼요. 프레이저는 이 구도를 넘어서야 한다고 말합니다. 정체성 투쟁 대신 대표성 투쟁으로, 인정 요구 대신 지위 확보로, 그래서 참여의 평등을 제도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해요.

가난과 무시 사이에서

이번 산책의 중심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가난하면서도 무시당하는 사람들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프레이저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재분배만으로도 부족하고 인정만으로도 부족해요. 참여의 평등을 보장하는 지위를 먼저 확보해야 합니다. 지위가 생기면 예산과 인력이 따라오고 문화가 바뀌고 법령이 정비됩니다. 그때 비로소 재분배와 인정을 동시에 논의할 수 있는 장이 열려요.

처음의 피자 비유에 프레이저의 답을 대 보면 이렇습니다. 피자를 몇 등분으로 나눌지도, 통성명을 먼저 할지도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일곱 명 모두가 테이블에 앉을 자리를 갖는 것입니다. 자리가 확보되면 나누는 방법은 자연스럽게 논의되고 서로가 누구인지도 알아가게 됩니다. 지위가 먼저고 그 위에서 인정과 분배가 함께 가야 합니다. 이것이 낸시 프레이저가 삼십 년간 붙들어 온 정의론의 핵심이에요.

함께 나눈 생각들

이번 산책의 중심 질문은 "가난하면서도 무시당하는 사람들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였습니다. 나눔노트에 남긴 생각을 각자의 목소리로 옮겼습니다.

01 지위를 주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지향)
지위를 줌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나에게는 의문이 남는다. 가난과 무시라는 조건만으로 어떤 지위를 줄 수 있는가.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보다 갈등 상황에서 이득을 취하는 구조가 더 문제 아닌가. 지위를 주는 것으로 편가르기가 방지될 수 있을까.

02 뮤지엄 교육에서 참여동등을 묻다 (혜선)
뮤지엄 교육에서의 접근성을 분석하면서 프레이저의 세 차원을 적용해 보았다. 경제적 재분배는 예산과 인건비 배분으로, 문화적 인정은 존재를 드러낼 기회가 있는지로, 정치적 대표는 프로그램 구성과 진행에 그들의 의견이 반영되는지로 점검했다. 가난하면서도 무시당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경제적 재분배, 문화적 인정, 정치적 대표, 그리고 돌봄이라고 생각한다.

03 혐오를 당하는 사람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용신)
혐오를 당하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인력을 배치하고 지위를 부여하고 예산을 배정한다. 그런데 모든 당사자를 위해 부서와 지위를 준다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 누군가는 계급성을 키워야 한다고 하고, 누군가는 당사자성을 키워야 한다고 할 텐데,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

04 완전한 재분배는 가능한가 (재은)
내 문제의식은 사회적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소외계층을 향한 정부 정책의 방향에서 시작한다. 내가 보는 문제는 사회적 재분배와 인정투쟁이고, 프레이저와는 사회적 지위 인정을 통해 문제에 접근한다는 데서 만난다. 다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완전한 재분배는 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마르크시즘의 아이디어를 자본주의의 허점을 고치는 데 빌려 올 수는 있어도 자본주의를 버리고 사회주의로 갈아탈 수는 없다. 오히려 미국이 세계를 제패한 것도 경제적 부를 추구할 명시적인 자유를 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05 자리를 그냥 주는 것이 아니다 (성재)
나는 그 자리를 그냥 주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리에 올라갈 수 있는 기회를 공평하게 열어주고, 그게 가능하도록 제도를 만드는 게 먼저다. 그렇게 올라간 자리에는 그에 따른 책임도 함께 따라야 한다. 사회에서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06 동등한 위치와 그 안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상태 (보은)
지위를 부여할 때 인정 위에 정의로운 분배가 가능하다. 인정만으로는 물화가 일어나고, 재분배만으로는 인정을 받을 수 없다. 지위가 생기면 진정으로 문제가 해결될까 하는 의문이 남지만, 동등한 위치와 그 위치 안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상태가 필요하다고 본다. 대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것이 문제 해결의 시작일 수 있다.

연탐대장의 단상노트

연구탐사대에서 사회문제를 연구하다 보면 "이 문제를 어디에서 논의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자주 부딪힙니다. 프레이저를 읽으며 그 답의 절반은 자리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논의할 자리가 없으면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도 들리지 않고, 자리가 있으면 말하지 않아도 예산과 제도가 따라옵니다. 청년 문제가 노동부에서는 인력 문제로, 문체부에서는 문화 향유 문제로 정의되는 것처럼, 자리가 없으면 남이 정해준 정체성 안에 갇히게 돼요. 연구가 현장의 목소리를 모아 문제를 새롭게 정의하는 일이라면, 그 일은 자리를 만드는 일과 닮아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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