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하는 말이 정말 내 말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철학산책 시즌7 열한 번째 산책 · 이경덕 「프레드릭 제임슨: 역사와 유토피아 공간」, 『처음 읽는 영미현대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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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건물에서 길을 잃어본 적이 있나요
처음 가본 건물에서 길을 잃어본 적이 있을 겁니다. 들어올 때 지나온 길을 되짚어 나가려는데 표지판이 없어서 방향을 잃고, 한 번 들렀던 가게를 다시 찾지 못합니다. 유독 길을 잃기 쉬웠던 장소가 있다면 떠올려보세요. 왜 길을 잃으셨나요?
프레드릭 제임슨은 이 길 잃음을 우리 시대를 비추는 알레고리로 읽었습니다. 알레고리란 작은 장면 하나로 더 큰 전체를 빗대어 보여 주는 이야기예요. 그가 예로 든 보나벤투라 호텔에서는 손님만 길을 잃는 게 아닙니다. 그 안에서 매일 장사하는 상점 주인들도 건물 전체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려 내지 못합니다. 제임슨이 보기에 사회 속 우리의 처지가 꼭 이렇습니다. 그는 그 전체를 그려 보는 일을 인식적 지도 그리기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쌓여 있지만 스스로는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을 정치적 무의식이라 불렀습니다.
잠깐, 지도가 없어서 정치적 무의식이 생기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치적 무의식은 지도가 있든 없든 이미 우리 안에 있습니다. 현실에서 풀리지 않은 모순은 억눌려 무의식으로 밀려 들어갑니다. 거기서 꿈처럼 상상 속에서 풀리다가, 문학이나 말처럼 사회가 받아들이는 형식을 얻어 밖으로 나옵니다. 이 과정은 뒤에서 자세히 다룹니다. 지도는 이 무의식을 만들거나 없애지 않고, 보이게 합니다. 지도를 그리면 내 안에서 올라온 생각이 어떤 전체의 한 조각인지 알아볼 수 있습니다.
지도가 없으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자기 안에 어떤 생각이 쌓여 있는지 모른 채, 누군가 건네준 말을 내 말인 줄 알고 되뇌게 됩니다. 뉴스가 하는 말을 그대로 따라 하고, 광고가 만든 욕망을 내 욕망으로 착각합니다. 제임슨은 바로 이 상태를 문제 삼았습니다. 오늘 산책은 그 길 잃음에서 시작해 지도를 그리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누구인가
프레드릭 제임슨은 1934년에 태어난 미국의 맑스주의 철학자이자 문화 이론가입니다. 박사논문은 사르트르 연구였습니다. 철학자의 박사논문이 그 사람 철학의 핵심을 보여준다고 할 때, 사르트르가 제임슨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사르트르 철학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자기를 벗어나야 자기가 보인다"입니다. 제임슨은 이 통찰을 사회 전체로 확장했습니다.
제임슨이 한 일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1968혁명을 전후해 유럽에서 마련된 맑스주의 연구의 토대를 미국에 들여왔습니다. 『맑스주의와 형식』에서 여러 맑스주의 사상가들을 소개하며 변증법적 사유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둘째, 『언어의 감옥』에서 러시아 형식주의와 프랑스 구조주의, 후기구조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했습니다. 셋째, 주저인 『정치적 무의식』을 통해 맑스주의 문학 연구 방법론을 확립했습니다.
그래서 제임슨을 읽는 일은 한 사람의 이론을 배우는 일이면서 20세기 후반의 이론 지형을 통째로 지나가는 일이 됩니다. 형식주의와 구조주의와 해체론과 포스트모더니즘이 차례로 그의 논의 안에서 자리를 잡고, 그 과정에서 변증법이라는 오래된 도구가 계속 다시 쓰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기를 벗어나야 자기가 보인다
사르트르의 대자 존재와 대타 존재를 먼저 봐야 합니다. 즉자 존재는 자기 스스로를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꼬리를 자동으로 흔드는 강아지처럼, 왜 흔드는지 묻지 않습니다. 반면 대자 존재는 "나는 누구인가, 왜 사는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대타 존재는 남도 나처럼 생각한다는 것을 압니다. 자기를 벗어나야 자기가 보인다는 것이 사르트르의 통찰입니다.
제임슨은 이 논리를 세계로 가져왔습니다. 제임슨은 중심부가 총체성을 인식할 수 없다고 봅니다. 비유하자면,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리는 차 안에 탄 파리를 생각해 보세요. 파리는 100킬로미터로 이동하지만 자기가 그렇게 빠르게 움직인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 안에 있으면 전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 논리를 옮겨 보면, 제국주의 서구도 자기가 얼마나 폭력적인지 모르고 그것을 비난하는 쪽도 자기가 얼마나 폭력적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주변부에 있는 사람에게는 이 전체가 다 보입니다. 속담에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하지만 고래 싸움을 볼 수 있는 것은 새우입니다. 고래들끼리는 치고박느라 자기 자신을 볼 수 없습니다. 소외되고 배제되고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이 세계 전체를 볼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 이것이 제임슨이 사르트르에게서 가져온 통찰입니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역사는 어떻게 아는가
제임슨을 이해하는 열쇠는 후기 자본주의라는 생산양식입니다. 생산양식이란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결합된 경제적 토대를 뜻하지만, 알튀세르 이후로는 삶과 문화 전반으로 의미가 넓어졌습니다. 낫으로 벼를 베던 농부 중심 사회에서 공장 컨베이어벨트의 산업사회로, 다시 데이터와 인공지능의 시대로 넘어가면서 생산의 주체와 기반이 통째로 바뀝니다. 삶의 양식이 바뀌면 정신세계도 함께 바뀝니다.
후기 자본주의란 무엇일까요. 형식은 그대로인데 내용이 달라졌을 때 앞에 "후기"라는 말을 붙입니다. 자본주의가 이미 한 세대 동안 현실화되어 이제는 경쟁하는 개념이 아니라 모든 곳에 그 요소가 포함된 사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상품처럼 가격이 매겨져 노동시장에서 거래되고, 영화는 손익계산서를 따져야 합니다.
그런데 문화나 역사 같은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말은 있는데 실체가 없는 것을 유명론이라 합니다.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임슨은 이것을 효과로 풀었습니다. 역사는 직접 볼 수 없지만 그 효과로만 알 수 있습니다. 억압된 것의 회귀처럼 돌아와 우리를 덮치는 순간, 예컨대 혁명이나 전쟁이나 위기의 순간에 비로소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코멘트에 코멘트가 붙으면 역사가 된다
자본주의 생산양식도 역사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모든 삶을 규정하되, 오직 우리의 이데올로기와 상징적 질서를 통해서 정의되고 가치판단됩니다. 그 규정들이 실재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코멘트라면, 맑스주의 연구는 이 코멘트에 대한 코멘트가 됩니다. 제임슨은 이것을 메타코멘터리라고 불렀습니다.
어느 토요일 아침의 독서 모임을 예로 들어 볼게요. "토요일 아침 8시에 일곱 명이 모여 제임슨을 읽었다"가 코멘트라면, 일주일 뒤 "그때 누군가의 말이 인상 깊었다"고 쓰는 것이 코멘트에 대한 코멘트입니다. 그것이 쌓이면 에세이가 되고 문학이 됩니다. 문학 작품 자체가 현실에 대한 작가의 코멘트이고, 우리가 읽는 순간 또 코멘트가 붙습니다.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넘어갈 때의 문화혁명은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선생님의 그림자도 밟지 않아야 한다고 믿었던 시대와 교권 추락을 말하는 지금이 얼마나 다른지 생각해 보세요. 이것이 자본주의 아래에서 과거의 신분적 권위가 녹아내리는 현상을 보여줍니다. 이 현상을 바라보고 쓰는 뉴스와 에세이와 영화가 모두 메타코멘터리이고, 그것이 쌓이면 역사가 됩니다.
이뤄지지 못한 소망은 꿈과 문학으로 돌아 나온다
현실에서 모순을 해결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꿈꾸기 시작합니다. 레비스트로스가 『슬픈 열대』에서 전한 사례를 보겠습니다. 네 부족 가운데 셋은 평등주의적 방식으로 결혼을 허용했지만 카두베오족만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현실의 제도 안에서 그 모순을 풀 길이 없자 여인들은 해결책을 꿈꾸기 시작했고 그것을 상상 속에 투사했습니다. 그 상상은 얼굴 장식이라는 형식을 얻었습니다. 화장법이라는 상징적 형식으로 사회적으로 용인되면서 모순을 상상적으로 해결한 것입니다.
제임슨은 바로 이 대목에 착안했습니다. 정치적 무의식이란, 현실에서 해결되지 않는 모순이 억압되어 무의식 속으로 밀려 들어가고, 거기서 꿈처럼 소망을 성취하다가,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상징적 형식을 얻어 드러나는 것입니다. 문학과 예술이 바로 그 통로입니다.

어릴 때 갖고 싶던 장난감을 못 사서 한 달 동안 그 장난감 꿈을 꾸는 아이를 떠올려 보세요. 그것이 정치적 무의식이 드러나는 방식입니다. 왜 "정치적"이냐고요. 정치학에서 정치란 가치의 권위적 배분입니다. 이뤄지지 않은 가치, 배분받지 못한 것에 대한 욕망이 무의식에 쌓였다가 문학과 코멘트라는 우회로로 나옵니다.
이데올로기와 꿈을 구분해야 합니다. 이데올로기는 상상계와 상징계의 연결입니다. 실재가 없는데도 사람들이 언어적 설득에 의해 존재하지 않는 것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 꿈은 실재계와 상징계를 연결해 상상계를 드러냅니다.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으나 무의식 속에 있던 것을 자신도 모르게 상상하는 것입니다. 꿈을 꾼다는 것에는 실재를 바꾼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이 눈으로 보면 모든 문학 작품을 정치적 무의식의 기록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떠올려 보세요. 이야기는 이미 죽은 소년의 영혼이 움직이는 데서 흘러갑니다. 한 사회가 말하지 못하고 눌러 둔 모순이 소설이라는 형식을 얻어 드러난 것입니다. 가장 소외된 사람의 자리에서 쓰면 그 자체로 세계문학이 된다는 세계문학론의 생각도 여기에 닿습니다. 한국인의 정치적 무의식이라는 파편은 세계인의 파편이기도 합니다.
상상계가 유독 크게 터져 나오는 시대도 있습니다. 푸시킨에서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체호프로 이어지는 19세기 러시아 문학이 그렇습니다. 차르 체제가 흔들리고 혁명으로 향하던 역사의 변곡점에서 쓰인 작품들입니다. 현실의 모순이 커질수록 풀리지 못한 소망도 쌓이고, 그것이 문학으로 쏟아져 나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시대의 소설을 제임슨의 방식으로 읽으면 몇 줄만으로도 그 뒤에 깔린 시대의 코멘트가 들립니다.
그래서 파편을 모아 지도를 그린다
제임슨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필요한 전략으로 제시한 것이 인식적 지도 그리기입니다. 제임슨이 예로 든 보나벤투라 호텔을 생각해 보세요. 방문자들뿐만 아니라 상점 주인들도 이 호텔에서 길을 잃습니다. 그들 모두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이 바로 그 공간에 대한 인식적 지도입니다.
인식적 지도란 파편이 어떤 전체의 파편인지를 알아보는 능력입니다. 500피스 퍼즐에서 조각 하나로는 뭔지 모르지만 100개쯤 맞추면 어떤 그림인지 압니다. 그 한 조각이 알레고리입니다. 알레고리를 모아 전체를 그려보는 것이 인식적 지도 그리기입니다.

국면 지도를 한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1960년대부터 2030년대까지 십 년 단위로 펼쳐 보면, 표층은 십 년마다 바뀌지만 매개와 심층은 훨씬 느리게 움직입니다. 1960년대 포드주의와 케인스식 관리 국가, 1970년대 오일쇼크와 브레턴우즈 붕괴, 1980년대 신자유주의, 1990년대 역사의 종언 선언과 지구화, 2000년대 금융위기, 2010년대 플랫폼 자본주의, 2020년대 팬데믹과 폴리크라이시스. 따로 온 것처럼 보이는 일들이 실은 하나의 구조에서 갈라져 나온 얼굴들입니다.
그런데 2030년대의 칸은 비어 있습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칸이 비어 있다는 사실이 결론이고, 이름을 붙이는 일은 우리 몫으로 남습니다.
지도를 그린 다음에야 꿈꿀 수 있다
제임슨은 자본주의 현실을 분석하는 데 제일 중요한 것이 상품을 보는 일이라고 합니다. 상품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가 결합된 것입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사용이라는 것이 대체로 다시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집니다. 내가 먹고 사는 것이 노동력을 만들어 팔기 위한 과정으로 되어 있지 않은가요.
유토피아적 공간은 바로 이 현실을 낯설게 바라보게 해줍니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에서부터 어슐러 르 귄의 『어둠의 왼손』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사회에 대한 성찰이 이어져 왔습니다. 이러한 공간은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또 앞으로 바뀔 수 있는 것으로 바라보게 해줍니다.
제임슨이 말년에 SF와 유토피아 연구로 간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정치적 무의식을 알고 인식적 지도를 그리면, 그다음에는 미래를 열린 방식으로 투사할 수 있게 됩니다. 더 이상 편견이나 혐오나 누군가 건네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우리가 정말 원하는 사회를 꿈꿀 수 있게 됩니다.
다만 제임슨의 한계도 있습니다. 맑스주의 관점에서 실재계를 중심으로 무의식을 살펴봤기 때문에, 상상계 쪽에서 정치적 무의식을 살펴보는 시도는 열려 있습니다. 로티가 바닥이 없어도 발길질이 헛되지 않다고 말한 것처럼, 바닥이 없어도 지도를 그리는 일은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번 산책의 중심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우리의 무의식은 어떨 때 현실에서 드러나는가. 무의식은 개인의 심리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말하지 못하고 눌러 둔 모순입니다. 그 모순은 고백이 아니라 이야기의 틈과 어긋남으로 나타납니다. 영화를 보거나 뉴스를 볼 때, 불편한 것을 보거나 너무 좋은 것을 봤을 때, 우리는 갑자기 수다스러워지곤 합니다. 그 순간 안에 쌓인 정치적 무의식이 새어 나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지도를 그린 다음에야 꿈꿀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그려낼 수 있을 때, 비로소 남이 건넨 말이 아니라 정말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함께 나눈 생각들
이번 산책의 중심 질문은 "우리의 무의식은 어떨 때 현실에서 드러나는가"였습니다. 나눔노트에 남긴 생각을 각자의 목소리로 옮겼습니다.
01 나와 다른 환경을 볼 때 내 안의 무의식이 튀어나온다 (지향)
문학이나 영화에서 나와 매우 다른 환경을 볼 때 평소에 생각하지 않았던 무의식이 발현한다. 또는 내가 중립적이라고 생각했던 문제가 뉴스화되거나 양극화되는 사건이 발생할 때 내가 무의식적으로 해왔던 생각이 드러난다. 다른 사람의 코멘터리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사회문제가 있고, 특별히 자신의 생각 없이 따르는 무리가 쉽게 발생한다.
02 금기에 도전할 때 파급력이 커진다 (용신)
책을 읽을 때, 영화를 볼 때, 미디어를 접할 때, 글을 쓸 때, 콘텐츠를 제작할 때 무의식이 드러난다. 금기사항에 도전할 때 파급력이 커진다. 오히려 시대를 앞서갈 때 더 문제가 생긴다. 혐오하는 사람들의 세계관과 그들의 메타코멘터리를 보면, 당사자가 아닌 한 누구나 혐오한다. 정치적 무의식 간의 싸움, 메타코멘터리 간의 싸움이 혐오 문제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03 갈등 상황에 봉착했을 때 무의식이 드러난다 (재은)
학생 생활지도를 포함해서 일상생활 중 특히 인간관계 갈등 상황에 봉착했을 때 무의식이 드러난다. 문화는 우리의 정치적 무의식을 드러내는 방편이다.
04 직장에서 재미를 찾는 것이 잘 안 될 때 (윤희)
평일 대다수의 시간을 할애하는 직장에서 사업적 업무에서 재미를 찾는 것이 잘 안 될 때 무의식이 드러난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라는 드라마 제목이 한때 내 바벨의 무덤을 대표했던 것 같다. 그런데 정치적 무의식의 관점에서 보면 정치는 가치들의 분배인데, 무가치하다고 판단하는 것 자체가 모더니즘적 관점일 수도 있지 않을까. 끊임없이 이상적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사람의 삶이라면 무가치한 것은 없지 않을까.
05 자극이 있을 때, 그래서 활동해야 한다 (보은)
프레드릭 제임슨의 관점으로 무의식을 해석해 본다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수많은 모순과 투쟁, 욕망의 흔적들이 내 안에 내재화되어 있는 것이다. 알레고리의 파편들로 만들어진 것들. 이러한 무의식이 현실에 드러나는 것이 코멘터리다. 무의식은 단순한 단편이 아니라 우리 안에 켜켜이 쌓인 알레고리의 구조가 발현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 드러날까. 자극이 있을 때다. 산책을 할 때, 불편한 것을 보았을 때, 좋은 것을 보았을 때. 그러니 활동해야 한다. 우리의 무의식을 발현하고, 그 발현된 것들이 또 다른 역사가 될 때, 이 반복들이 모여서 구체적인 상상을 할 수 있게 되겠구나.
연탐대장의 단상노트
제임슨을 읽으며 인식적 지도 그리기라는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돕니다. 연구탐사대에서 사회문제를 연구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문제를 정의하는 것인데요, 제임슨 식으로 말하면 그것은 지도를 그리는 일이에요. 어떤 문제를 연구한다고 할 때, 그 문제가 어느 전체의 파편인지를 먼저 그려봐야 합니다. 지도 없이 연구를 시작하면 누군가 건네준 프레임 안에서만 맴돌게 돼요. 뉴스가 정의한 문제, 정책이 정의한 문제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오늘 대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무의식이 드러나는 순간은 결국 뭔가와 부딪히는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갈등 상황, 낯선 환경, 불편한 것, 재미가 없는 것. 그 부딪힘이 지도를 그리는 출발점이 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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