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에 쥔 규칙은 몇 개뿐인데 어떻게 끝없는 말이 흘러나올까요
철학산책 시즌7 아홉 번째 산책 · 강주헌 「노엄 촘스키: 언어철학과 정치관」, 『처음 읽는 영미현대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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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문장을 왜 이해하나요
지금 이 문장은 여러분이 태어나서 처음 읽는 문장일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해하는 데 아무 어려움이 없을까요. 누구도 이렇게 말한 적이 없는데 우리는 곧바로 뜻을 알아챕니다. 이 평범한 사실에서 출발하는 것이 촘스키의 철학입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문장을 만들고 또 즉시 이해하는 능력, 그가 평생 붙들고 설명하려 한 수수께끼가 바로 여기 있어요.
오늘 산책에서 만나는 노엄 촘스키는 변형생성문법의 창시자이자 미국 외교정책의 비판자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이해하려면 먼저 언어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물어야 해요. 언어가 경험에서 오는지, 아니면 우리 안에 이미 있는지. 이 물음이 교육을 어떻게 할지, 사회를 어떻게 구성할지까지 뻗어 나갑니다. 언어를 어떻게 보느냐가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와 곧바로 이어지기 때문이에요.
철학자인가 언어학자인가
촘스키를 누구라고 부를 것인지부터 정해야 합니다. 이력만 보면 언어학자입니다. 1928년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나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언어학과 수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1957년 『통어론적 구조』로 현대 언어학의 판도를 바꿔놓았어요. 그런데 우리가 아는 이름은 정치에서 왔습니다. 『여론 조작』에서 선전 모델로 언론을 해부하고, 미국 외교정책과 세계 경제를 비판하며 현장에 참여하는 지식인으로 살았으니까요.
여기서 갈림이 생깁니다. 철학을 인간과 세계의 근본 원리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정의하면 촘스키는 철학자가 아닙니다. 그는 이런 뜻의 철학을 연구한 적이 없고, 브리태니커도 그를 언어학자로 분류해요. 그런데 철학을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인생관과 세계관으로 정의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촘스키에게는 분명히 그런 것이 있고, 이 정의로 보면 그는 철학자가 맞습니다.

문제는 촘스키가 아니라 우리가 철학이라는 말을 정의하지 않은 채 쓰고 있다는 데 있어요. 어떤 말을 하든 개념부터 갈라놓고 시작한다는 태도, 이것이 그에게서 배울 첫 번째 교훈입니다. 대화의 첫걸음은 같은 단어를 같은 뜻으로 쓰고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에요.
유한이 무한을 낳습니다
생성이라는 말을 어떻게 읽느냐가 핵심입니다. 그저 만들어낸다는 뜻으로 읽으면 기존 문법에 새 이름표만 붙인 셈이 돼요. 촘스키의 생성은 훨씬 수학적입니다. 유한한 규칙에서 무한한 문장이 나온다는 사실 자체를 가리키고, 이것이 인간 언어의 가장 놀라운 특징이에요. 아이가 듣는 말을 생각해 보면 이 점이 선명해집니다.
아이가 듣는 말은 양이 적고 중간에 끊기거나 틀린 문장도 섞여 있어요. 틀렸다고 알려주는 일도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도 몇 해 만에 복잡한 규칙을 다 잡아냅니다. 들어간 것은 적은데 나온 것은 크다. 촘스키는 이 간극을 플라톤의 문제라고 불렀어요. 경험만으로는 이 간극을 메울 수 없으니, 마음을 백지로 본 노선 대신 합리주의가 다시 불려 나옵니다. 아이가 이미 무언가를 갖고 태어난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문장 안에 문장을 넣는 조작을 떠올려 보세요. "나는 그가 그녀가 온다고 말했다고 생각한다." 한 겹을 더 씌우면 문장은 그만큼 더 길어집니다. 멈추는 지점이 없어요. 규칙은 늘어나지 않았는데 만들 수 있는 문장의 수만 무한해집니다. 우리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문장을 만들고,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문장을 곧바로 이해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같은 뿌리에서 정반대의 상속자가 나왔습니다
촘스키를 이해하려면 그가 무엇과 싸웠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소쉬르에서 시작해야 해요. 20세기 인문학 전체의 문법이 된 구별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랑그와 파롤의 구별, 기호의 자의성, 차이의 체계. 소쉬르는 언어를 개인이 내뱉는 말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약속의 체계로 보았어요. 낱말의 값은 그 자체의 속성이 아니라 다른 낱말들과 맺는 대립 관계에서 나온다는 것이 그의 핵심 통찰이에요.
같은 뿌리에서 두 갈래가 뻗어 나갔습니다. 하나는 주체를 세우는 길이에요. 미국의 기술언어학을 거쳐 촘스키에 이르는 흐름입니다. 촘스키는 변형을 머릿속에 실제로 있는 것으로 다시 읽었어요. 다른 하나는 주체를 지우는 길입니다. 프랑스 구조주의가 차이의 체계를 친족과 신화와 무의식으로 넓히면서 말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구조라는 결론에 이르렀어요.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소쉬르는 언어를 잘 정리된 사전으로 보았고, 촘스키는 문장을 찍어내는 공장으로 보았어요. 사전은 이미 있는 것을 찾아보는 곳이고, 공장은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곳입니다. 같은 뿌리에서 갈라진 이 두 상속자가 1971년 에인트호번에서 실제로 마주 앉게 됩니다.
언어가 여럿이니 세계도 여럿인가요
보편문법과 정면으로 맞서는 언어관이 하나 있습니다. 사피어와 워프의 언어결정론이에요. 언어는 사고를 담는 그릇이 아니라 사고의 틀 자체라는 주장입니다. 독일어의 다리는 여성 명사여서 우아하다고 하고, 스페인어의 다리는 남성 명사여서 웅장하다고 합니다. 같은 다리를 두고 말이에요. 언어가 달라지면 세계를 보는 방식도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촘스키라면 이렇게 답합니다. 언어들 사이의 차이는 매개변수 값의 차이일 뿐이고, 그 밑에는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하나의 구조가 있다고요. 서로 다른 언어를 번역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공통의 구조가 깔려 있다는 증거입니다. 신조어를 만들어도 통하는 것, 한 번도 들어보지 않은 문장을 곧바로 이해하는 것, 모두 같은 이유예요. 언어는 겉으로만 여럿이고 속은 하나라는 거예요.
영화 〈컨택트〉가 언어결정론을 끝까지 밀어붙인 상상입니다. 인간의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흐르고, 원인이 먼저 있고 결과가 뒤따릅니다. 그래서 나의 이득이 곧 남의 손해가 되는 제로섬 구도가 자연스럽게 따라 나오고, 경쟁과 갈등이 기본값이 됩니다. 헵타포드의 시간은 다릅니다. 모든 순간이 한 덩어리로 함께 있어요. 문자도 시작과 끝이 없는 원형이고, 빼앗는다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으니 경쟁 대신 공존이 기본값이 됩니다.

정부와 군은 그들이 건넨 문장을 무기를 주러 왔다는 선전포고로 읽었습니다. 그러나 그 무기는 파괴의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제로섬 사고를 깨뜨릴 인식의 도구였어요. 언어가 달라지면 세계를 보는 방식도 달라진다는 언어결정론의 끝을 영화가 보여줍니다.
저항의 근거를 어디에 둘까요
1971년 11월 에인트호번에서 두 지성이 마주 앉았습니다. 촘스키와 푸코예요. 주제는 인간 본성과 권력이었습니다. 촘스키는 해방의 근거를 인간 본성에서 찾습니다. 빈약한 자료로 복잡한 규칙에 도달하니 미리 조직된 구조가 있고, 정의와 권력을 갈라놓으면 좋은 사회를 가릴 근거가 사라진다고 봤어요. 푸코는 그 본성 개념 자체를 역사의 산물로 봅니다. 담론의 경계를 표시하는 말이고, 지식의 배치가 바뀌면 자리를 옮긴다는 거예요. 정의라는 관념부터가 권력의 도구로 발명되었다고요.

두 사람이 유일하게 합의한 지점이 있습니다. 중립처럼 보이는 교육과 의료와 사법이 은밀히 행사하는 폭력을 드러내는 것이 지식인의 일이라는 데 동의했어요. 학교의 시간표와 좌석과 시험은 가르치기 위한 장치처럼 보이지만 누가 성실한 학생인지를 정하고 그 기준을 몸에 새겨 넣습니다. 병원의 진료 기록과 분류는 치료를 위한 장치처럼 보이지만 누가 정상이고 누가 아닌지를 나누는 기준이 되기도 해요.
그런데 비판의 이유가 달랐습니다. 촘스키는 제도가 본래의 능력을 억압하기 때문에 비판했어요. 억압을 거두면 원래 있던 것이 드러난다는 거예요. 푸코는 제도가 사람을 특정한 방식으로 만들어내기 때문에 분석했습니다. 원래 있던 것 자체가 제도의 산물이라는 거예요. 같은 편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 왜 끝내 만나지 못했는지가 여기서 드러납니다.
그 규칙 자체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판정이 나지 않은 채 지금도 이어지는 쟁점들이 있습니다. 언어모델과 자극의 빈곤 문제가 그중 하나예요. 문법 규칙을 넣어주지 않았는데도 기계가 문법적인 문장을 만들어냅니다. 그렇다면 생득 구조 없이도 언어를 설명할 길이 열린 것일까요. 촘스키는 언어모델이 가능한 언어와 불가능한 언어를 똑같이 학습하므로 설명이 되지 못한다고 반박했어요.
언어를 개인 두뇌의 상태로 보면 의미의 규범성과 해석의 공동체성이 설명에서 빠져나갑니다. 비트겐슈타인 계열과 촘스키가 갈라지는 자리이고, 아직 어느 쪽도 상대를 설득하지 못했어요. 저항의 근거를 인간 본성에 둘 것인가, 아니면 그 본성 개념까지 의심할 것인가라는 물음도 여전합니다. 이 물음은 인권 담론의 보편성 논쟁으로 그대로 이어지며 지금도 살아 있어요.
중심 질문으로 돌아오면 답은 규칙의 개수가 아니라 규칙이 자기 자신에게 다시 적용된다는 데 있습니다. 문장 안에 문장을 넣는 조작에는 멈추는 지점이 없어서, 같은 규칙을 한 번 더 쓰기만 하면 문장은 얼마든지 길어집니다. 손에 쥔 것이 몇 개뿐이어도 만들어낼 수 있는 말의 수는 무한해지고, 우리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문장을 곧바로 이해하는 것도 같은 이유예요. 촘스키는 이 능력을 배워서 얻는 것이 아니라 타고나는 것으로 보았고, 보편문법과 인간 본성에 관한 주장이 모두 여기에서 뻗어 나옵니다.
함께 나눈 생각들
이번 산책의 중심 질문은 "손에 쥔 규칙은 몇 개뿐인데 어떻게 끝없는 말이 흘러나오는가"였습니다. 나눔노트에 남긴 생각을 각자의 목소리로 옮겼습니다.
01 사고가 언어를 낳는다 (지향)
인간은 선천적으로 언어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이 시스템을 갖고 태어나며, 내면의 인지능력으로 끊임없이 말을 생성할 수 있다. 다만 나는 사고를 통해 언어가 끊임없이 생성된다고 본다. 그래서 사고가 언어를 낳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02 같은 언어로 배웠는데 왜 다른 생각을 할까 (용신)
우리가 기본적으로 권장하는 사회의 덕목은 한 가지인데 실제 사람마다 발현은 다르다. 선한 행위를 하는 사람도 있고 악한 행위를 하는 사람도 있다. 같은 언어로 배웠으나 다른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사람마다 다른 구조를 갖고 태어나는 것일까. 언어는 주의의 방향을 기울일 뿐 세계의 방향을 정하지 않는다는 말이 남는다.
03 언어 규칙이 있으므로 무한한 말이 가능하다 (재은)
언어도 수학공식처럼 규칙에 기반하고 있으므로 무한한 말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인간만이 가진 언어 능력이 어디에서 왔는지가 촘스키의 시작점이었다. 본질을 가리는 언론과 거짓을 말하는 언론을 읽어내는 문해력이 그의 정치철학과 만나는 자리다.
04 소통과 언어는 다르다 (윤희)
소통과 언어는 다르다. 언어모델은 수단의 일종이고, 언어 사용자가 복합성을 높여가며 갱신해가는 것이 중요하다.
05 아이들은 왜 말을 할 수 있을까 (보은)
우리가 유한을 무한으로 할 수 있는 이유는 생득적으로 취득한 기본문법의 언어로 계속해서 변형생성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언어습득이 떠오른다.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는데 왜 모두 말을 할 수 있을까. 말은 소통으로 봐야 할까 언어로 봐야 할까.
06 인간 안의 역량이 무한을 생성한다 (윤상)
언어로부터 유한에서 무한이 나오는 것을 발견한다. 인간의 본성에는 이성이 있으나 제대로 정보를 전달받지 못한다. 인간 안에 있는 역량이 무한을 생성한다. 인간본성론과 연결되는 자리다.
연탐대장의 단상노트
연구탐사대에서 사회문제를 연구하다 보면 이 문제가 왜 지금 이런 방식으로 다뤄지는지를 자주 묻게 됩니다. 촘스키를 읽으며 그 물음의 절반은 언론이 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사실을 앞에 놓고 어떤 사실을 빼느냐가 문제의 정의를 먼저 정해 버리니까요. 그런데 촘스키는 거기서 비관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누구나 처음 듣는 문장을 이해하는 능력을 갖고 태어났다면, 양질의 정보가 닿기만 하면 누구나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는 믿음이 거기서 나와요. 연구가 현장의 목소리를 모아 제대로 된 정보로 내놓는 일이라면, 그 일은 사람들을 대신해 판단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판단할 재료를 돌려드리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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