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닥이 없는데 발길질은 헛된 일일까요
철학산책 시즌7 여덟 번째 산책 · 이유선 「리처드 로티: 문화정치로서의 철학」, 『처음 읽는 영미현대철학』
삶은 아이러니한데, 철학만 정상인 척해도 될까요
아이러니라는 말을 언제 쓰시나요. 예상과 어긋날 때, 말도 안 되는 일이 겹칠 때, 어쩔 수 없이 웃을 수밖에 없을 때. 그렇다면 반대는 언제일까요. 예상한 대로 됐을 때요.
그런데 우리 삶은 어느 쪽에 가깝나요. 돌아보면 아이러니 쪽입니다. 우연의 연속이에요.
리처드 로티는 바로 여기서 출발합니다. 삶이 아이러니하면 철학도 아이러니해야 하지 않느냐고요. 삶은 우연이 남발하는데 왜 철학만 정상인 척을 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왜 그 정상에 맞춰 살아야 하는가. 로티가 평생 붙든 질문이 여기 있습니다.
진리는 경험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로티가 어디에 서 있는지는 진리를 어디에 두느냐로 갈립니다.
독일 철학은 진리가 우리 내면에 있다고 봅니다. 헤겔의 변증법도 프로이트의 무의식도 안쪽으로 파고들죠. 프랑스 철학은 진리가 너와 나 사이에서 만들어진다고 봅니다. 누구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가 관건이에요.
영미 철학은 다릅니다. 진리는 조건 속에서, 경험과 과정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경험과 과정은 정해져 있지 않아요. 언제나 아이러니합니다. 그래서 로티가 영미 철학으로 분류됩니다.

영화 터미네이터2를 떠올려 보세요.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T-800은 형체가 정해져 있고 움직임이 예상되는 구형 모델입니다. T-1000은 파편이 우연히 모여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최신형이고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경험이 쌓이고 인생을 더 살수록 유연해져요. 예상대로 되는 게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예상대로 되지 않아도 대처하게 됩니다.
정원의 꽃이 아니라 야생란입니다
로티에게는 합쳐지지 않는 두 기둥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세계입니다. 1930년대 미국 노동운동의 한복판에서 자랐고 아버지는 좌파 잡지의 편집장이었어요. 트로츠키가 멕시코에서 암살당하고 듀이가 조사위원회를 이끌 때 아버지가 수행비서로 따라갔습니다. 로티에게 트로츠키라는 이름은 책에서 배운 이론이 아니라 부모가 살아낸 삶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열 살도 안 된 아이가 뉴저지 산악지대를 돌아다니며 모은 세계입니다. 야생란의 개화 시기와 라틴어 학명을 줄줄 외웠어요. 거기서 확신 하나가 자랐습니다. 누구와도 완전히 소통할 수 없는 자기만의 세계가 있고, 그 세계에서 자기를 만들어가는 일이 소중하다는 것.
책 제목이 '트로츠키의 야생란'이 아니라 트로츠키'와' 야생란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두 기둥은 접속사로만 이어져 있어요.

야생란은 어떤 존재일까요. 거칠지만 아름답고 생명력이 강합니다. 누구도 손대지 않고 자라요.
여기서 장소와 공간의 구분이 드러납니다. 정갈하게 화초가 꽂힌 정원은 인간이 머릿속 이데아를 자연에 투영해 만든 공간입니다. 야생화가 피는 곳은 우연과 사건이 계속 일어나는 장소고요. 고속도로에서 졸음운전 사고가 잦은 이유도 같습니다. 시속 100킬로미터에 맞춰 달리는 그곳은 우연이 제거된 비장소라서 머릿속 공간이 그대로 앞에 겹쳐 보이거든요.
그리고 중요한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야생화끼리는 서로 비교하지 않아요. 파는 꽃이 되는 순간 가격에 따라 무엇이 더 예쁜지가 매겨지죠.
거울을 치우면 무엇이 남을까요
우리는 진리를 언제나 무언가에 비추어 본다는 게 문제입니다.
플라톤에게는 이데아와 누스가 있었고, 근대 인식론에는 세계와 마음이 있었고, 20세기 언어적 전회에는 세계와 언어가 있었습니다. 첫 산책에서 만난 비트겐슈타인의 그림 이론도 여기 속하고요. 로티가 보기에 이게 전부 똑같습니다. 2,500년 동안 표상 관계를 조금씩 변형해온 역사일 뿐이라는 거예요.

로티가 택한 방법이 흥미롭습니다. 반박하지 않았어요. 반박은 같은 게임 안에 머무니까요.
하이데거는 이데아라는 원판을 뭉개버립니다. 정리된 그림을 뭉게구름으로 만들어놓죠. 그러면 재미있는 일이 생깁니다. 원판이 흐려지면 그것을 모방한 현실도 원본과 같은지 확인할 길이 없어집니다. 거울을 깨는 대신 비출 대상을 흐려놓는 방식이에요.
지난주 퍼트남이 사실과 가치의 이분법을 걷어냈다면, 로티는 그 이분법을 만들어낸 틀 자체를 치웁니다. 진리·본질·표상이라는 낡은 어휘를 유용성·대화·재서술로 갈아끼우는 일, 그것이 문화정치로서의 철학입니다.
왜 하필 어휘냐고요. 고통과 잔인성이 현존하는 어휘 속에 감추어져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회에서는 여성 자신도 그것이 고통인지 모를 수 있어요. 그러나 누군가 그것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순간 사회가 바뀔 힘이 생깁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던져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정리를 듣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거울입니다. 직접 쓰지 않으면 거울은 계속 존재해요.
자기를 다시 쓰는 사람, 아이러니스트
그러면 거울 없이 사는 사람은 어떤 모습일까요. 로티는 그를 아이러니스트라고 부릅니다.
아이러니스트에게는 마지막 어휘가 있습니다. 더 이상 뒤로 물러설 수 없는 언어의 층이죠. 다만 그는 그것이 우연히 자기에게 온 것임을 압니다. 그래서 철학자와 다른 종류의 불안을 안고 살아요. 철학자는 진리를 놓칠까 두려워하지만 아이러니스트는 자기 삶이 누군가의 복제물일까 봐 불안해합니다.

니체의 위버멘쉬도 이 자리에서 다시 읽힙니다. 영원불멸의 진리를 깨달은 초인이 아니에요. 가변적이고 일시적이고 우연적인 것을 긍정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등장합니다. 시인은 현실적으로 가장 무력한 존재예요. 시를 써서 먹고살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도 자기 삶의 의미를 피안이나 이데아가 아니라 자기가 만든 언어에서 가져오기 때문에 가장 자율적입니다.
왜 철학자들이 하나같이 시인을 가장 높이 칠까요. 시인은 우주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과 AI의 차이가 무엇인지 물으면 망설임과 주저함이라고 답할 수 있어요. 수많은 일시성과 아이러니 속에서 단어 하나를 뽑아낼 때 우리 안에서는 해석의 갈등이 일어납니다.
자기가 써둔 글을 나중에 다시 읽으면 새롭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일주일 전에 쓴 글인데 지금 봐도 낯설어요. 삶이 아이러니하니까요.
자기완성만으로는 무관심의 괴물이 됩니다
여기서 멈추면 로티가 아닙니다. 자기완성에 성공한 사람이 곧 훌륭한 인간인 것은 아니니까요.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매몰돼 거기서 기쁨을 느끼다 죽는다면 모든 인간은 일종의 오타쿠로 끝나고 맙니다. 나보코프의 『롤리타』 주인공이 그렇죠. 한 사람에게 빠져 주변의 모든 인물을 간과합니다. 로티는 이것을 무관심의 괴물이라고 불렀어요. 그래서 아이러니스트가 동시에 자유주의자가 되기를 촉구합니다.
로티의 자유주의는 우리가 아는 그 자유주의가 아닙니다. 무언가로부터 벗어나는 자유가 아니라,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으로 잔인성을 줄여가는 사람이 자유주의자예요. 다른 사람이 아파하는데 자기 혼자 맛있는 것을 먹을 수는 없다는 겁니다.
기준은 감수성 하나뿐입니다. 연대의 이론적 토대를 찾지 않아요. 무엇이 고통이고 무엇이 잔인한지는 사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할 일은 '우리'의 경계를 넓혀 고통받는 사람을 그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 산책의 롤스와 비교하면 차이가 분명해집니다. 롤스는 최소 수혜자를 먼저 생각하라는 원칙을 세웠죠. 로티는 그것마저 플라톤주의라고 봅니다. 원칙을 세우지 말고 감수성을 발휘해 그 사람이 왜 고통스러운지를 알라는 겁니다. 그러면 제도와 관습을 바꿔야 한다는 데까지 저절로 가게 되고요.
신병훈련소에서 새벽 두 시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납니다. 열어보니 배가 고픈 친구가 혼자 초코파이를 먹고 있어요. 그런데 스무 명이 야 나도 나도 하면서 같이 꺼내 먹습니다. 계급장을 떼고 만나면 근거를 묻지 않는 연대가 가능해집니다.
바닥이 없는데, 발길질은 헛될까요
이번 산책의 중심 질문이 여기서 나옵니다.
"바닥이 없는데, 바닥을 치고 올라가는 것은 헛발질인가 아니면 그것 자체로 의미가 있는가."
정리된 철학 없이 철학하는 것, 방향성 없이 살아가는 것. 기준이 없는데 계속 발길질만 하고 있는 것 같을 때 그 발길질에도 의미가 있느냐는 물음입니다.
로티의 대답은 놀랍도록 소박합니다. 진리가 아니라면 왜 그 제안을 따라야 하느냐고 물으면, 그렇게 하는 것이 안 하는 것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답해요. 정당화의 수준을 낮춤으로써 오히려 반박하기 어려워지는 방식입니다.
자연의 거울에는 이분법이 없습니다. 강과 산과 들판을 나누는 것은 인간이지 자연이 아니니까요. 그렇게 보면 표상을 버린 자리에 남는 것은 허무가 아니라 일상입니다. 로티가 일상을 폄하하는 철학자들과는 어울리지 않겠다고 말한 이유이기도 하고요.
한나 아렌트의 문장으로 마무리해 봅니다. 사람들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 현재가 있다고 말하지만 현재는 이념으로만 존재할 뿐 그 존재를 증명할 수 없습니다. 증명하려면 표상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아렌트는 이렇게 다시 씁니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 우리가 있다.
바닥이 없어도 발길질이 헛되지 않은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딛고 설 토대를 먼저 찾고 나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옆에 있는 사람과 함께 움직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나눈 생각들
이번 산책의 중심 질문은 "바닥이 없는데, 바닥을 치고 올라가는 것은 헛발질인가 아니면 그것 자체로 의미가 있는가"였습니다. 대원들이 나눔노트에 남긴 생각을 각자의 목소리로 옮겼습니다.
01 발길질이 모이면 새로운 기준이 된다 (지향)
절대적 진리가 없다면 발길질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 그 발길질이 모여 연대를 이룰 때 변화가 일어나고 새로운 기준이 될 수 있다. 절대적 토대를 찾는 대신 실용주의적으로 현실을 보는 관점에서 의미가 있다. 아이러니스트는 무관심의 괴물이 될 수 있으니 반드시 자유주의자를 겸해야 한다. 남은 물음이 있다. 잔인하지 않은 사람이 많아질수록 잔인한 사람도 함께 많아지는 것 같은 현상은 무엇일까.
02 막막할 때 곁에 서주는 것이 선배의 역할이다 (용신)
로티 같은 선배가 있다면 어떨까. 우리 사회의 혐오 문제를 놓고 거울을 만드는 과정을 함께 해보자. 거울 보기 운동이라는 이름을 붙여본다. 중심 질문에 대해서는 그 과정 자체가 거울을 보며 자신을 성찰하는 일 아닐까. 선배와 어른은 막막할 때 위로하고 한계를 짚어주고 동기를 부여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모두가 한곳으로 치달을 때 나는 어디에서 중심을 잡아야 하는가.
03 감수성을 감각하는 것이 바닥이라면 (윤희)
바닥이 아예 없지는 않다고 본다. 각자에게 내재된 인간적 감수성을 감각하는 것이 바닥이라면, 그것은 헛발질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행위다. 로티가 말한 자유로운 인간을 이렇게 읽는다. 감수성을 키워 상대를 나처럼 여기고 자아의 경계를 깨는 사람. 현실의 자본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자기 존재를 긍정적으로 감각하며 실천하는 사람이 가장 자유롭고 그가 곧 시인이다. 난곡여성의료협동조합 구성원들의 자율성과 주체성이 그 사례다. 공공 영역의 혈연과 지연 이기주의를 오늘의 문제로 꼽는다.
04 바닥이 없어도 그 안에서 헤엄친다 (성재)
바닥이라는 지점은 없지만 그 안에서 헤엄치며 하는 헛발질도 결국 해결 지점을 찾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것 또한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나를 믿는 일, 전쟁에서의 국제법 같은 것을 의지의 계승이라는 말로 함께 놓는다. 사회 문제는 하나로 규정되지 않고 계속 바뀌며 계속 해결된다. 이 관점이 로티와 만나는 자리다. 다만 물러서지 않는 지점이 있다. 그렇다 해도 평등이나 선의 추구 같은 절대 진리는 존재하는 것 아닐까.
05 기준 없이 나아가는 것이 가능할까 (보은)
질문을 되돌려 묻는다. 바닥을 기준으로 본다면 기준 없이 나아가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표상 위에 생겨난 확증편향, 그러니까 보는 것에서 시작된 절대 진리를 로티가 겨눈 문제로 읽는다. 사회문제에 절대적인 해결이 있을까. 우리는 정말 문제가 해결된 세상을 기대하는가. 답의 자리에는 인간적 감수성과 아이러니 위에 서는 창조성을 놓는다. 그럼에도 기대할 수 있다.
연탐대장의 단상노트
연구탐사대를 운영하다 보면 그 연구가 당장 무엇을 바꾸느냐는 물음을 가장 자주 듣습니다. 저는 이 물음 앞에서 늘 조금 작아졌어요. 대학도 아니고 연구소도 아닌 자리에서 하는 연구라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로티를 읽고 나니 그 작아짐의 정체가 조금 보입니다. 저는 온실 안의 꽃을 기준으로 우리를 재고 있었던 거예요. 야생화끼리는 서로 비교하지 않는다는 말이 오래 남습니다. 바닥이 있어야 발길질이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옆에 함께 발을 구르는 사람이 있어서 의미가 생기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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