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지금 어떤 판 위에서 퍼즐을 맞추고 있을까
철학산책 시즌7 세 번째 산책 · 토마스 쿤 『과학혁명의 구조』
회의실에서 쓰는 그 단어는 어디서 왔을까
"패러다임이 바뀌었죠."
회의에서도 뉴스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씁니다. 그런데 이 말은 원래 과학철학의 전문 용어였습니다. 1962년 『과학혁명의 구조』가 나오기 전에는 일상에서 찾기 어려웠어요.
어휘가 바뀌었다는 건 사유의 조건이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쿤이 흔든 건 개별 이론이 아니었습니다. 과학에 대한 상식적 이미지 자체였죠. 세 번째 산책에서 우리가 붙든 물음은 이것이었습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비교할 수 없는 두 패러다임 중 무엇이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왜 쿤을 영미철학에 넣었을까
발제를 맡은 경인 님이 먼저 던진 질문입니다. 쿤은 철학과에 몸담은 적이 없어요. 하버드에서 고체물리학으로 박사를 받은 물리학자였습니다.
시즌의 흐름을 되짚으면 답이 보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매개로 봤습니다. 바깥의 것이 어떻게 내 안의 경험이 되는지를 언어에서 찾았죠. 화이트헤드는 사건과 과정에서 찾았습니다. 그렇다면 쿤은 무엇에서 찾았을까요. 과학자 공동체가 공유하는 것, 패러다임입니다.
제목도 힌트입니다. 왜 하필 '구조'였을까요. 구조가 행동을 만든다는 발상이 이미 들어 있습니다. 연구자 집단의 구조가 서면 그 안에 패러다임이 생기고, 그 패러다임이 집단의 행동 방식을 규정합니다. 철학산책도 그렇습니다. 토요일 아침 여덟 시에 줌으로 들어온다는 행동은 이 구조가 규정한 것이죠.
정상과학은 퍼즐풀이입니다
쿤은 대부분의 과학 활동을 퍼즐풀이에 비유합니다. 새로운 진리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하지만, 그 안에서도 충분한 의미가 있습니다. 퍼즐의 정답은 이미 정해져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그 답을 완성해가는 데 있어 큰 효능감을 얻죠.
답이 있다는 사실이 탐구를 생산적으로 만듭니다. 방향이 정해져 있으니 깊이 파고들 수 있어요. 정밀한 전문성도 혁신적 진보도 이 지루한 반복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퍼즐풀이가 가능하려면 공통의 모델이 있어야 합니다. 쿤은 이를 예제라고 부릅니다. 등대처럼 후속 연구를 인도하는 모범적 성취죠. 명령서가 아니라 참조할 사례입니다. 확장은 유비적 추론으로 이뤄집니다. 닮은 방식을 골라 넓혀가는 거예요. 비트겐슈타인의 가족 유사성과 같은 구조입니다. 영미철학자들은 정말 서로 닮았습니다.
변칙은 반증이 아닙니다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을 쿤은 반증 사례라 부르지 않고, 변칙이라고 부릅니다. 통계를 다뤄본 분이라면 변칙에 대해 익숙할텐데요. 데이터 중 몇 개가 튀는 것, 이상치라고 하죠. 우리는 대개 이상치를 제외 시킵니다. 그것 하나로 이론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영향을 주지 않죠. (일반적으로는요)
변칙은 세 갈래로 처리됩니다. 보조가설을 덧붙여 봉합하거나, 측정 오류로 무시하거나, 그래도 순치되지 않으면 쌓입니다. 그러다 상황이 바뀝니다. 바로 시간에 따른 축적이 일어났을때, 그리고 대안이 발견 될 때 입니다.
포퍼와 갈라서는 지점이 여기예요. 포퍼에게 반증은 이론과 증거의 2항 관계입니다. 반박 사례를 찾는 순간 이론이 무너지죠. 쿤에게 반증은 대안이 있을 때만 성립하는 3항 관계이자 역사적 과정입니다.
경인 님이 든 예가 선명했습니다. 여덟 시에 열 명이 모이기로 했는데 늘 다섯 명만 옵니다. 이건 반증일까요. 그냥 시간을 바꾸면 됩니다. 시간 변경이 바로 대안 패러다임이에요.
우리는 이미 어떤 판 위에 있습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아시나요. 대원들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유튜브에서, 책에서 익혔다고 했어요.
"여러분은 지금 그 학파가 만든 패러다임을 공유하고 계신 겁니다."
관찰하기 전에는 알 수 없고 관찰 행위가 결과에 개입한다는 그 설명. 우리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데이비드 봄은 전혀 다른 판을 제안했습니다. 모든 것이 주파수로 연결되어 있다고 본 거죠. 그 판에서는 양자 얽힘이 다르게 설명됩니다.
봄의 조각을 기존 판에 끼우면 맞지 않습니다. 아무리 껴도 안 맞아요. 그러면 다른 판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공약불가능성입니다. 두 패러다임은 공통의 척도로 비교되지 않습니다. 이론이 달라지면 세상을 분류하는 범주 자체가 달라지기 때문이죠. 쿤의 표현으로는 "서로 다른 세계에 거주한다"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월한가
여기서 중심질문으로 돌아옵니다. 공약불가능성이 참이라면 우열 판정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쿤의 대답은 "불가능하다"가 아니었습니다. "알고리즘이 없을 뿐이다"였어요. 네 갈래로 나뉩니다.
공통의 잣대는 없습니다. 중립적 관찰 언어도, 공유된 판정 규칙도 없어요. 전면적 우월을 계산해낼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도 좋은 이유는 있습니다. 정확성, 일관성, 적용 범위, 단순성, 다산성. 다만 이 가치들은 서로 충돌하고 가중치가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래서 계산이 아니라 판단이 됩니다.
우월은 국소적입니다. 새 패러다임이 옛것의 모든 문제를 푸는 건 아니에요. 우월하다면 모든 면에서가 아니라 특정 문제군을 더 잘 푼다는 뜻입니다. 진보의 방향도 바뀝니다. 진리를 향해 끌려가는 진보가 아니라 이전 상태로부터 밀려나는 진화입니다. 그래서 쿤의 유명한 정리가 나옵니다. 합리적(rational)이지는 않아도 합당(reasonable)합니다.
창의성은 고수에서 나옵니다
가장 뒤집히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창의성은 천재의 비판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집단이 패러다임을 고수하려는 고된 노력에서 나옵니다.
공유된 예제가 없으면 무엇이 변칙인지조차 식별되지 않으니까요. 비판적 지성은 위기 때만 등장합니다. 평시를 지탱하는 건 보수적 명민성입니다. 기초를 늘 흔드는 조직은 위기에도 혁명에도 이르지 못합니다. 체계가 등장하고 나서야 혁명이 시작됩니다.
연구탐사대로 옮기면 세 마디가 됩니다. 고수, 공유 예제 하나를 문서화하고 정상탐사의 프로토콜을 합의할 것. 축적, 이상한 결과 하나에 방향을 바꾸지 말고 봉합과 진짜 변칙을 구분해 기록할 것. 전환, 축적과 설명력 의심과 대안 프레임이 모두 모일 때만 바꿀 것. 대안 없는 비판은 허무주의에 멈춥니다.
나가며
우리도 이미 하나의 패러다임 위에 서 있습니다. 현장에서 문제를 찾고, 예언자적 상상력으로 비판하고, 사회적 비전을 제안한다는 공약. 기존 대학이 가진 것과 다르죠. 그래서 때로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토요일 아침 여덟 시에 모여 철학을 읽는 일도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Abnormal 사례죠. 그런데 그런 사례가 계속 쌓이고 있습니다.
경인 님은 아이들 교육 이야기로 물음을 열어두었습니다. 패러다임이 계속 바뀐다면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대원들의 답은 갈렸습니다. 절대적 진리를 먼저 가리켜야 한다, 수동적 태도를 버리고 상상하고 비판하게 해야 한다, 패러다임 자체를 가르쳐야 한다. 우리가 도착한 자리는 메타인지였습니다. 판 안에서 퍼즐을 맞추는 능력이 아니라, 지금 내가 어떤 판 위에 있는지를 보는 능력이요.
다음 산책에서는 누구에게나 공평한 규칙을 만들 수 있을까 하는 물음으로 존 롤스를 만납니다.
함께 나눈 생각들
무엇이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 없다는 합의에서 갈라진 걸음들
가장 많은 답은 "없다"였습니다. 같은 잣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한 대원은 두 패러다임을 비교하는 일을 서로 다른 두 종교를 비교하는 일에 빗댔습니다. 한쪽에서 정상으로 받아들여진 것이 다른 쪽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같은 자로 재려 하면 애초에 그런 자가 없다는 사실만 확인하게 됩니다.
흥미로운 건 그다음이었습니다. 몇몇 대원은 우월을 판정하려는 동기 자체를 문제 삼았습니다. 왜 굳이 우월을 정의하려 하는가. 설득하고 흡수하기 위해서라면 그건 이미 침략적인 사고가 아닌가.
"우월을 정의하려는 이유? 설득하고, 흡수하기 위해서 — 침략적 사고"
같은 우려가 다른 언어로도 나왔습니다. 다른 패러다임을 가진 공동체를 향해 우월하다고 판단하는 순간, 식민주의와 같은 폐해가 생긴다는 지적이었어요. 인식론의 물음이 곧바로 정치의 물음으로 넘어가는 자리입니다. 우월이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논쟁을 닫으면서 종결되는 것 아니냐는 되물음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걸음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한편에서는 쿤의 인식적 가치를 붙들었습니다. 기계적 판정은 불가능해도 좋은 이유로 뒷받침되는 합당함은 남는다는 것이죠.
다른 편에서는 시간을 끌어들였습니다. 이전 패러다임을 인지한 채로 다음으로 넘어가는 편이 누적이라는 점에서 진실에 조금 더 가깝지 않겠냐는 물음이었어요. 사회가 변하면 하나가 다른 하나를 흡수하지 않겠냐는 관측도 있었습니다. 우월보다는 조합이라는 표현도 나왔습니다.
물음은 열린 채로 남았습니다. 선과 악이라는 패러다임도 바뀔 수 있는 것인지, 이전 인지가 퇴색한 자리를 그래도 우월이라 부를 수 있는지. 한 대원은 과학과 사회과학의 차이를 짚기도 했습니다. 과학이 견고한 합의를 특징으로 한다면, 사회과학과 철학의 세계는 세계관과 가치를 둘러싼 격심한 불화가 특징이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가 선 자리에서 이 물음은 더 어려워집니다.
연탐대장의 단상노트
우월을 따질 잣대가 없다는 데까지는 금세 모였는데, 그다음에서 갈라진 게 저는 오래 남았어요. 연구탐사대가 예언자적 연구라는 다른 판을 들고 나온 이상, 우리도 "우리 것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없는 자리에 서 있는 셈이거든요. 그러면 남는 건 설득이 아니라 축적이겠구나 싶었습니다. 토요일 아침 여덟 시에 모여 철학을 읽는 이 이상한 일이 계속 쌓여야, 누군가 이 판을 하나의 선택지로 볼 테니까요. 대안 없는 비판은 허무주의에 멈춘다는 문장을, 이번엔 우리 쪽으로 돌려 읽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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