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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를 고르는 순간, 우리는 이미 가치 안에 있습니다
·철학산책철학산책 시즌7

팩트를 고르는 순간, 우리는 이미 가치 안에 있습니다

철학산책 시즌7 일곱 번째 산책 · 황희숙 「힐러리 퍼트남: 이분법을 넘어선 새로운 철학」, 『처음 읽는 영미현대철학』


그건 네 의견이고, 팩트를 가져와

일곱 번째 산책은 이 문장으로 열렸습니다. 발제 첫 장에 그대로 적혀 있었어요. 이 말이 나오는 순간 대화의 승부가 갈립니다. 사실의 편은 이긴 것처럼 보이고 의견의 편은 말을 잃죠. 우리 대화에서 아주 익숙한 장면입니다.

그런데 경인님이 곧바로 되물으셨습니다. 그 "팩트"는 누가, 무엇을 중요하다고 여겨, 골라서 잰 것인가요. 언론 기사를 예로 드셨어요. 팩트체크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실은 그 매체가 가진 관점을 투영한 팩트체크라는 겁니다. 무엇을 확인할 대상으로 고를지부터가 이미 판단이니까요. 힐러리 퍼트남은 바로 이 믿음에 평생 시비를 건 철학자입니다.

신의 자리에서 내려오면 무엇이 남을까

퍼트남이 마주한 것은 두 개의 극단이었습니다. 한쪽은 형이상학적 실재론입니다. 세계는 우리 인식과 무관하게 고정된 채로 있고 그 세계를 참되게 기술하는 방식은 딱 하나라는 입장이죠. 그런데 이 말이 성립하려면 누군가 세계 바깥에 서서 내려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신의 자리 말입니다. 다른 쪽은 상대주의입니다. 마음이 세계를 구성하고 구성된 세계는 여럿이니 절대적으로 옳은 이론은 없다는 것이죠. 무엇이든 된다(anything goes)는 말로 요약되고요.

퍼트남은 제3의 길을 냅니다. "마음과 세계가 공동으로 마음과 세계를 구성한다." 우리는 개념 체계 안에서만 세계를 만나지만 세계는 그 안에서 분명히 저항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내재적 실재론입니다.

실재를 보는 세 입장을 나란히 놓은 도식. 형이상학적 실재론은 세계가 인식과 무관하게 고정되어 있고 참되게 기술하는 방식은 하나뿐이라고 보고, 상대주의는 마음이 세계를 구성하니 절대적으로 옳은 이론은 없다고 보며, 내재적 실재론은 개념 체계 안에서만 세계를 만나지만 세계가 그 안에서 분명히 저항한다고 본다
실재를 보는 세 입장을 나란히 놓은 도식. 형이상학적 실재론은 세계가 인식과 무관하게 고정되어 있고 참되게 기술하는 방식은 하나뿐이라고 보고, 상대주의는 마음이 세계를 구성하니 절대적으로 옳은 이론은 없다고 보며, 내재적 실재론은 개념 체계 안에서만 세계를 만나지만 세계가 그 안에서 분명히 저항한다고 본다

세계 바깥에 설 수도, 아무 지도나 옳다고 할 수도 없다면 남는 길.

지도를 떠올리면 쉽습니다. 메르카토르 지도와 페터스 지도는 같은 지구를 다르게 그립니다. 유일하게 참된 지도는 없어요. 그렇다고 아무 지도나 되는 것도 아닙니다. 지구의 실제 모양이 모든 지도를 제약하니까요. 경인님은 여기서 아프리카 이야기를 꺼내셨어요. 실제로 측정하면 아프리카는 우리가 흔히 보는 지도보다 훨씬 큽니다. 서양이 그린 지도라 유럽은 크게, 아프리카는 작게 들어간 것이죠. 한국을 위로 뻗어나가게 뒤집어 그린 지도 이야기도 나왔고요. 별자리도 같습니다. 같은 별들을 그리스는 오리온으로, 동아시아는 삼수로 묶었어요. 별자리는 문화가 만들지만, 별의 위치는 문화가 만들지 못합니다. 퍼트남이 말한 '경험적 입력'이 바로 이것입니다.

'잔인하다'는 사실인가요, 평가인가요

사실과 가치를 갈라놓은 역사는 깁니다. 흄이 사실에서 당위를 이끌어낼 수 없다고 했고 논리실증주의는 아예 윤리학을 무의미로 규정해 지식의 영역에서 밀어냈습니다. 퍼트남은 이 구도를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고 불렀어요. 어떤 역사가가 로마 황제를 '잔인하다'고 기술했다고 해봅시다. 이분법을 믿는 사람은 심문하듯 묻습니다. 그건 가치판단입니까, 기술입니까. '잔인한'은 관찰 가능한 속성입니까, 이론 용어입니까.

퍼트남의 반문이 통쾌합니다. 누군가를 잔인하다고 말할 때마다 우리가 어떤 두뇌 상태 이론에 동의하는 것이냐고요. 침대에 맞지 않는 행인의 다리를 자르고 있는 것 아니냐고 되묻습니다. '잔인한'처럼 기술과 평가가 한 몸인 말을 퍼트남은 두터운 윤리적 개념이라고 불렀습니다. 무례한, 무자비한, 우아한, 서툰 같은 말들이죠. 놀랍게도 우리 언어의 대부분이 여기 속합니다.

"우리 아이 담임은 매우 잔인한 분이에요"라고 하면 기술과 평가가 한 번에 전달됩니다. 여기에 "잔인하지만 좋은 교사예요"라고 덧붙이면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죠. 그래서 퍼트남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맥락 안에서 사실과 가치를 구분하는 일은 가능하고 필요합니다. 다만 그 구분에서 형이상학적 이분법이 따라 나오지는 않습니다. 경계는 넓고 흐릿하니까요.

객관성도 하나의 가치입니다

여기서 이번 이번주 산책의 주제가 나옵니다. 진리도, 정당성도, 객관성도 모두 가치입니다. 과학이 무언가를 "객관적으로" 밝혔다고 말할 때, 그 객관성 자체가 이미 하나의 가치입니다. 그러니 과학은 가치 위에 서 있는 셈이죠.

이 말이 과학을 깎아내리는 것으로 들릴 수 있는데, 정반대입니다. 퍼트남이 겨눈 것은 과학이 아니라 과학주의였어요. 과학만이 관점과 무관하게 세계를 기술한다는 믿음, 그리고 철학에 남은 일은 과학적 해결책의 윤곽을 그리는 것뿐이라는 선언 말입니다. 퍼트남의 역설은 여기 있습니다. 과학을 지키려면 과학주의와 싸워야 한다는 것. 방법론적 환원주의를 버려도 과학적 실천은 멀쩡히 잘 굴러가니까요.

경인님은 양자역학을 예로 드셨습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따르면 전자 하나의 위치도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전자가 수없이 모여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확정하겠냐는 거예요.

그러면 연구는 어떻게 쓰나요

우리는 연구할 때는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사악하다"라고 쓰면 뒤에 그것을 증명하는 팩트가 따라와야 하죠. 레퍼런스가 없으면 주장이 서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문에서 쓰는 문장은 하나같이 객관주의를 표방합니다. 지도교수가 "이거 누가 보더라도 맞는 얘기야?"라고 되물을 때, 그 물음도 객관주의 위에 서 있고요. 그래서 우리는 묻습니다. "그러면 글을 어떻게 쓸까요? 객관적으로 쓰는 건 불가능한데."

퍼트남의 답은 객관성을 버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발제 마지막 장의 질문이 그 답에 가깝습니다. 내가 "팩트"라고 내세운 주장에 들어 있던 가치를 드러내는 일은, 객관성에서 멀어지는 길일까요 가까워지는 길일까요. 지식과 정보는 이제 넘칩니다. 그래서 중요해진 것은 일상 안에서 사실과 가치를 엮어 나만의 것을 만들어내는 일이라고요. 퍼트남을 지금 다시 읽어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입장을 바꾸는 것이 용기입니다

퍼트남은 기능주의를 제창했다가 폐기했습니다. 과학적 실재론을 주장했다가 1981년에 철회했고요. 내재적 실재론을 내놓고는 다시 수정해 실용주의로 옮겨갔습니다.

퍼트남이 입장을 바꿔온 순서를 정리한 도식. 기능주의를 제창한 뒤 폐기했고, 과학적 실재론을 1981년에 철회했으며, 내재적 실재론을 내놓고 다시 수정해 실용주의로 옮겨갔다
퍼트남이 입장을 바꿔온 순서를 정리한 도식. 기능주의를 제창한 뒤 폐기했고, 과학적 실재론을 1981년에 철회했으며, 내재적 실재론을 내놓고 다시 수정해 실용주의로 옮겨갔다

밖에서 보면 일관성이 없고, 안에서 보면 전부 논증의 결과였습니다.

밖에서 보면 일관성이 없어 보입니다. 읽는 사람은 짜증이 나죠. 안에서 보면 그 번복이 전부 정교한 논증의 결과였습니다. 줄타기를 하는 사람은 가만히 서 있을 수 없습니다. 흔들림은 결함이 아니라 균형을 찾는 방법이었어요. 새 논증 앞에서도 입장을 지키는 것은 지조가 아니라 고집이고, 바꾸는 쪽이 더 큰 용기를 요구한다는 것이 아닐까를 퍼트넘을 보면서 느끼게 됩니다.

함께 나눈 생각들

이번 산책의 중심 질문은 "사실과 가치가 한 몸으로 얽혀 있다면, 인간은 과연 객관성을 가질 수 있는가"였습니다. 대원들이 나눔노트에 남긴 생각을 한 분씩 정리했습니다.

01 절대적 객관성은 없지만, 공통의 기준은 만들 수 있습니다 (지향)
사람마다 지닌 생각과 가치가 다르니 같은 사건을 보고도 사실을 저마다 다르게 설명하게 된다고 보셨습니다. 그래서 절대적 객관성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요. 다만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다수가 동의하는 공통의 정의와 가치 판단의 기준을 만들어두고 그 안에서 최대한 객관성을 유지하려 한다는 겁니다. 남은 물음은 규범과 법질서를 모두 동원해도 여전히 생기는 허점이었어요. 가치판단에 앞서 사실이 무엇이고 단어의 정의가 무엇인지부터 따지려는 태도가 퍼트남과 만나는 지점이라고 하셨습니다.

02 혐오를 내재적 실재론으로 풀어볼 수 있을까요 (용신)
우리 사회의 혐오 문제를 퍼트남의 방식으로 다뤄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내재적 실재론의 관점으로 혐오를 이해하고 거기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려는 시도였어요. 그런데 중심 질문 앞에서는 조심스러워지셨습니다. 객관성을 갖기는 어렵겠고 하나하나 따지자면 에너지가 너무 많이 들겠다고요. 그러다 오히려 제대로 된 사고를 막게 되는 것은 아닐지 되물으셨습니다. 남은 질문은 이것이었어요. 나쁜 행동을 하고 나쁜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는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03 한시적으로 객관적일 뿐입니다 (재은)
과학적으로 입증되고 다수가 참이라고 받아들였으며 아직 반박되지 않은 이론을 우리는 객관적 사실이라고 부른다고 정리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과학적 사실이 만고불변의 진리일 수는 없고 언제든 새로운 이론으로 대체될 수 있다고요. 그러니 한시적으로 객관적이라 말해지는 명제가 영원히 그러리라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퍼트남이 겨눈 것을 과학만능주의와 보이지 않는 가치에 대한 폄하로 읽으셨고, 철학에서 윤리의 당위를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을 짚으셨어요. 다만 철학이 지나친 상대주의로 빠지면 공동체의 화합이 어려워지지 않겠느냐는 유의점도 함께 남기셨습니다.

04 의미가 사회에 분산돼 있다면, 능력도 그렇지 않을까요 (성재)
퍼트남의 문제의식을 의미가 개인의 머릿속만으로 결정되지 않고 물리적 환경과 언어공동체에 의해 정해진다는 데서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구조를 자신의 문제로 옮겨오셨어요. 언어의 의미가 개인이 아니라 전문가 집단에 분산되어 있듯, 능력과 부도 개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법과 제도에 의존한다는 겁니다. 두 구조가 닮았다고 느끼셨다고요. 다만 여기서 한 발 물러서는 신중함도 함께 적으셨습니다. 개인에게 속한 개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데까지 가면 곤란하니, 능력은 사회에 빚지고 있지만 그 보상을 개인이 전부 독점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선에서 멈추셨어요. 재분배가 옳다고 느끼면서도 내가 번 것을 왜 가져가느냐는 직관적 반박을 완전히 논파하기는 어렵다는 점도 솔직하게 남기셨습니다.

05 주관을 벗어나는 대신, 검증을 거쳐 설득을 얻는 객관성 (보은)
객관성이라는 말부터 다시 물으셨습니다. 주관과 편견에서 벗어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성질이라는 사전적 정의를 가져온 뒤, 그것이 우리에게 가능한 일인지 되물으셨어요. 그리고 다른 정의를 제안하셨습니다. 주관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주관에서 출발해 검증을 거쳐 많은 이들의 설득을 받아내는 객관성이라고요. 문제를 객관적으로만 판단하려 할 때 지식이 생명력을 잃을 수 있다는 우려도 함께 적으셨습니다. 내재적 실재론 위에서 우리가 설득하고 합의할 수 있는지를 붙들다가 나온 답이 본문에 인용한 그 문장이었어요.

연탐대장의 단상노트

연구탐사대에서 연구계획서를 볼 때 가장 오래 붙들게 되는 칸이 "왜 이 문제인가"입니다. 저는 이 칸을 한동안 연구자의 동기를 확인하는 요식 절차쯤으로 여겼어요. 퍼트남을 읽고 나니 다르게 보입니다. 그 칸은 내가 수많은 사실 중에 왜 하필 이것을 골라 재기로 했는지를 밝히는 자리이고 그렇다면 객관성을 깎아먹는 칸이 아니라 오히려 객관성을 세우는 칸입니다. 우리가 연구를 사회문제 해결의 방식으로 훈련한다고 말할 때, 그 훈련의 첫 단추는 자기가 딛고 선 가치를 숨기지 않고 적어내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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