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너뜨린 다음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철학산책 시즌7 여섯 번째 산책 · 정원섭 「마이클 왈쩌: 정의로운 전쟁」, 『처음 읽는 영미현대철학』
전쟁을 반대하면, 터진 전쟁은 누가 멈추나요
여섯 번째 산책은 전쟁 이야기로 열렸습니다. "뉴스에서 전쟁 소식이 나오면 어떻게 하세요?" 우리는 전쟁 장면이 나오면 대개 채널을 돌리게 됩니다.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고 느끼니까 오히려 불편함을 덜어내고 싶죠. 마이클 왈쩌는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 사람입니다. 왈쩌는 전쟁이 왜 일어나는지를 묻는 데서 멈추지 않았어요. 이미 일어난 전쟁을 어떻게 최소한으로 만들 것인가를 물었습니다.
이상하게 들리실 수 있습니다. 경인님도 스무 해 전 이 책을 읽으며 교수님께 계속 따져 물었다고 하셨어요.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게 있다니 그러면 전쟁을 해도 된다는 말이냐고요. 그런데 왈쩌가 겨눈 과녁은 따로 있었습니다. 우리 편의 무력함이었어요. 평화주의자는 전쟁에 반대합니다. 전쟁이 터지고 나면 무엇을 하나요. 여전히 "전쟁 반대"를 말합니다. 그사이 미사일은 날아가고 있고요. 현실주의자는 전쟁이란 원래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쩔 수 없다고 하니 역시 아무것도 막지 못합니다.
한쪽은 시작을 못 막고 다른 쪽은 진행을 못 막습니다. 그 사이에 아무도 말하지 않는 구간이 생깁니다. 왈쩌는 평생 그 빈칸을 붙들었어요. 그 대가로 진보 진영에서 오래 욕을 먹었죠.
이미 벌어진 일에도 지켜야 할 선이 있습니다
빈칸을 채우려면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왈쩌는 그 기준을 새로 발명하지 않고 서양이 이천 년간 쌓아온 논의에서 끌어냈어요. 키케로는 전쟁이 공식적으로 선포되어야 하고 복수가 아니라 평화를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4세기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는 이웃과 조국을 지키는 군사 행동이라면 도덕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보았고요. 아우구스티누스는 여기에 합법적 권위와 올바른 의도를 더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것을 세 조건으로 정리했어요. 합법적 권위, 정당한 원인, 올바른 의도입니다.
왈쩌는 이 논의를 세 개의 관문으로 다시 짰습니다.
전쟁을 시작할 때는 정당한 명분과 합법적 권위, 올바른 의도가 있어야 하고 최후의 수단이어야 합니다. 전쟁 중에는 군인과 민간인을 구별해야 하고 무력의 크기도 상대와 비슷해야 합니다. 생화학 무기는 안 되고 포로는 인도적으로 대우해야 하고요. 인종 학살과 강간은 절대 안 됩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추가 전투를 멈추고 환경을 복구하고 피해를 보상하고 책임자를 재판해야 합니다.

시작 전, 전쟁 중, 끝난 뒤. 어느 단계에서도 도덕적 책임은 사라지지 않는다.
여기서 왈쩌가 덧붙이는 한마디가 이 사람의 자리를 보여줍니다. "이 모든 것을 다 지켜도 당신의 손은 이미 더러워졌다." 참전한 이상 정당함이 면죄부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는 전쟁을 옹호한 적이 없어요. 다만 이미 벌어진 일 안에서도 사람이 사람으로 남을 수 있는 선이 있다고 봤습니다.
이 기준을 손에 쥐면 무엇이 달라질까요. 발제 중에 이런 질문이 나왔습니다. 지금 이 전쟁을 두고 우리가 어떤 메시지를 내야 하느냐고요. "전쟁하지 마라"는 이미 늦었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할 수 있죠. 민간 시설을 건드리지 마라, 민간인을 건드리지 마라, 제네바 협약을 지켜라, 빨리 끝내라. 이 문장들은 타격 목표를 정하는 사람의 손을 실제로 잠깐 멈추게 합니다.
왈쩌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건 전쟁 속에서도 도덕이 살아남는 장면을 봤기 때문입니다. 유럽에서는 종이 울리는 동안 전투가 멈추곤 했습니다. 슬라보예 지젝은 『폭력이란 무엇인가』에서 한 장면을 전합니다. 흑인 여성을 쫓던 백인 경찰이 그가 흘린 신발을 주워 신겨줍니다. 두 사람이 눈을 마주친 뒤 경찰은 가만히 서 있고 여성은 달아났다는 이야기예요.
이 질문은 전쟁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전쟁 이야기입니다. 발제가 후반으로 넘어가면서 이야기의 중심을 우리 쪽으로 바꿔봅니다.
왈쩌의 다른 책들을 늘어놓으면 같은 패턴이 반복됩니다. 그가 박사 논문으로 쓴 『성인들의 혁명』, 출애굽기를 혁명으로 읽은 『출애굽과 혁명』, 그리고 『해석과 사회비판』까지요. 전공이 역사학이었던 이 사람은 늘 혁명이 끝난 다음을 들여다봤습니다.
출애굽 이야기가 특히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빠져나와 가나안까지 가는 데 사십 년이 걸립니다. 홍해를 건너는 데 걸린 시간이 아니에요. 이백 년간 몸에 밴 이집트의 문화를 벗고 새로운 땅에서 살아갈 방식을 하나하나 만드는 데 걸린 시간입니다. 그러니까 출애굽 자체는 혁명이 아니고, 광야의 사십 년이 혁명이었던 셈이죠.
우리에게도 비슷한 자리가 있습니다. 1987년에 민주화를 이뤘습니다. 그 다음에 "독재가 아닌 바른 세상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왔어요. 여기에 우리는 충분히 답하지 못했습니다. 왈쩌가 여러 인터뷰에서 지적한 대목입니다. 경제 민주화라는 말은 이미 1987년 헌법에 들어 있었어요. 그런데 십 년 뒤에 온 것은 IMF였습니다.

떠나는 순간보다 오래 걸리는 일, 함께 살아갈 방식을 배우는 시간.
무너뜨린 다음을 말하지 않으면
무너뜨린 다음을 말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살던 대로 돌아갑니다. 다르게 살 방법을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으니까요. 영화 <암살>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릅니다. 왜 우리를 배신했느냐고 묻자 이정재가 답하죠. "해방이 될 줄 몰랐으니까." 왈쩌를 읽고 나면 이 대사가 다르게 들립니다. 해방이 될 줄 알도록 만드는 일, 해방된 다음의 정치와 경제와 문화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 미리 그려두는 일이 남아 있다는 뜻이 아닐까요?
미국의 러스트벨트에서 벌어진 일도 같은 구조라는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누구에게는 새로운 자유가 선언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살아온 방식이 통째로 틀렸다는 말을 들은 사람들에게는 그다음이 없었어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물음에 아무도 답하지 않았고요. 그 빈칸이 정치적으로 어디로 갔는지는 우리가 아는 대로입니다.
같은 물음이 이날 우리 안에서도 나왔습니다. 재은님이 나눔노트에 남긴 질문이 그대로 이것이었어요. 혁명을 이룬 다음, 그 공백을 채울 공동체의 치유 방안은 무엇인가. 왈쩌가 평생 붙들었던 자리에 우리도 가닿은 셈입니다.
그래서 왈쩌는 도덕 법칙을 다루는 세 번째 길을 냅니다. 종교처럼 이미 있는 것을 발견하는 길이 있고 롤스처럼 함께 모여 합의로 발명하는 길이 있습니다. 왈쩌는 둘 다 아니라고 해요. 사람들은 어제까지 살던 삶을 딱 잘라내고 새 규칙으로 갈아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남은 길은 해석입니다. 이미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언어에서 해방의 자원을 발굴하는 일이죠.
전통을 극복할 과거로만 취급하지 말자는 것, 부정과 계승 사이에서 해석이 일어나도록 돕는 것. 왈쩌는 이것을 지식인의 책무라고 불렀습니다. 지난 산책에서 매킨타이어가 말한 서사와 겹쳐 읽으면 뜻이 더 분명해집니다. 사람은 이야기 밖으로 나가서 새 사람이 되지 않아요. 살던 이야기를 다시 해석하면서 옮겨갑니다.
돈이 표를 사고 학벌을 살 때
그렇다면 해석은 어디에서 이루어질까요. 왈쩌는 『정의와 다원적 평등』에서 세상을 여러 개의 영역으로 나눕니다. 시장이 있고 정치가 있고 교육이 있고 신앙이 있고 가족이 있습니다. 각 영역에는 그 영역의 사람들이 합의한 고유한 원칙이 있어요.
정의는 여기서 아주 단순해집니다. 한 영역의 원칙이 다른 영역으로 넘어가지 않는 것. 이것이 다원적 평등입니다.
돈과 상품을 자유롭게 교환하는 것은 시장의 원칙입니다. 이 원칙이 정치로 넘어오면 어떻게 될까요. 주주총회처럼 지분을 많이 가진 사람이 결정권을 많이 갖게 되죠.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이 표를 더 갖는 셈입니다. 교육으로 넘어오면 돈으로 좋은 학교를 삽니다. 종교로 넘어오면 큰 교회가 작은 교회를 사들이고요. 한 영역에서 우위를 점한 사람이 그 힘으로 다른 영역까지 자기 원칙으로 포섭합니다. 왈쩌는 그것을 지배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하나의 가치가 모든 영역을 다 삼킨 상태를 전제정치라고 하죠.
그래서 필요한 기술이 경계를 긋는 일, 분리의 기술입니다. 롤스는 겹치는 영역에서 합의를 이루자고 했지만 왈쩌는 겹쳐 있다고 해서 같은 원칙이 적용되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그건 그 공동체 안의 사람들이 정하기 나름이라는 거죠.

시장의 돈이 정치·교육·신앙·가족의 기준까지 대신하지 않도록.
그 경계는 누가 그었을까요
이번 산책의 중심 질문은 여기서 나옵니다.
"영역을 지키는 것이 정의라면, 그 경계 자체는 누가 그었는가."
쉽지 않은 질문입니다. 경계를 누군가 위에서 그어준다면 그건 이미 하나의 지배일 테고요. 그렇다고 이미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서 경계를 읽어내자고 하면 어떤 공동체도 한 목소리로 말하지 않는다는 문제가 남습니다. 지배당하는 쪽에도 자기 해석과 비판이 있으니까요. 경인님은 이 질문을 성원권으로 옮기며 산책을 마무리하셨습니다. 왈쩌가 내놓는 답의 핵심은 결국 누구에게 구성원의 자격을 줄 것인가에 있어요.
법학부 시절 은사이신 이국운 교수님께 배운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예수는 누가 진정한 이웃이냐고 묻습니다. 왈쩌를 읽고 나면 이 질문을 뒤집어야 합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선한 이웃인가가 아니라, 내가 저 사람에게 선한 이웃일 수 있는가. 이것이 공동체를 유지하는 힘이라고 하셨어요.
세대 갈등에 이 렌즈를 대보면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기성세대가 잘못됐다거나 요즘 세대가 문제라는 말은 왈쩌의 눈으로 보면 성립하지 않아요. 그 구성원들에게는 그 방식이 맞기 때문입니다. 함께 살려면 서로의 삶의 방식을 해석해서 새로운 질서를 같이 만드는 수밖에 없습니다.

경계는 한 번 그어 끝나는 선이 아니라, 함께 다시 해석해야 하는 약속이다.
함께 나눈 생각들
이번 산책의 중심 질문은 "영역을 지키는 것이 정의라면, 그 경계 자체는 누가 그었는가"였습니다. 대원들이 나눔노트에 남긴 생각을 한 분씩 정리했습니다.
01. 다원주의를 인정하면, 반인륜적인 일도 묵인하게 되지 않을까요 (지향)
각 공동체마다 가치가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이 마음에 걸린다고 했습니다. 어떤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는 반인륜적인 일까지 용인될 수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경계는 인간이 공동으로 추구하는 도덕적 선 위에 놓여야 한다고 답했어요. 지금 벌어지는 전쟁들도 결국 돈을 위한 정치적 도발에 가깝고 전쟁 이후의 회복을 준비하는 방편이 비어 있다는 점을 문제로 꼽았습니다.
02. 혐오는 우리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입니다 (용신)
인종과 계층, 성별과 연령을 가로지르는 혐오를 내부의 전쟁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왈쩌가 말한 싸움을 관리하는 기술,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기준이 필요한 자리라고 짚었어요. 다만 안 된다고 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구속력을 가지려면 무엇이 더 필요한지를 물었습니다. 경계를 긋는 사람으로는 권력자 대신 노인과 아동, 일반 시민의 목소리를 듣는 이들을 꼽았고요.
03. 혁명을 이룬 다음의 공백은 무엇으로 채우나요 (재은)
오늘의 문제로는 돈의 가치가 배려와 존중의 영역까지 넘어오는 장면을 들었습니다. 경제 영역에서 최고인 가치가 다른 영역에서도 그대로 통용되지는 않죠. 그 지점에서 왈쩌와 만난다고 했고요. 남은 질문은 혁명 이후의 공백을 채울 공동체의 치유 방안입니다. 경계를 그은 주체로는 관습과 역사와 구성원의 의견을 들었어요. 민주사회라면 다수가 전제주의라면 소수 지배층이 그것을 정하게 된다고 봤습니다.
04. 영역을 넘는 일이 자연스럽다면, 막을 수 있는 건 제도뿐입니다 (성재)
자본이 잠식해 태어나는 순간부터 출발선이 달라지는 사회를 문제로 보면서도 영역과 영역 사이를 넘나드는 일 자체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경향이 아니냐는 의문을 함께 던졌어요. 개인들 간의 합의에만 맡기면 그 침범이 방치되거나 정당화되기 쉽습니다. 침범을 악으로 규정하고 막을 힘을 가진 것은 국가와 제도뿐이라고 답했습니다.
05. 지식은 일이 벌어지는 과정 안에도 필요합니다 (보은)
기획 단계와 사후 분석에만 지식이 있고 정작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는 지식이 닿지 않습니다. 그 문제를 짚었어요. 현장을 절대화하면 과정에서 지킬 원칙을 세우기 어려워진다고 했고요. 경계에 대해서는 영역 안의 특성이 경계를 만들되 그것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시대와 공유하는 패러다임에 따라 달라지니까요. 서로 다른 원칙 속에 있음을 알고 긴장을 유지할 때 정의가 구현된다고 정리했습니다.
06. 답이 갈렸다는 것 자체가 왈쩌의 답이었습니다
경계를 누가 그었느냐는 물음에 다섯 사람의 답이 모두 달랐습니다. 국가와 제도라는 답이 있었고, 인간 공동의 도덕적 선이라는 답이 있었고, 관습과 다수의 의견이라는 답이 있었고, 힘없는 시민의 목소리라는 답이 있었고, 영역 안의 특성이라는 답이 있었어요. 왈쩌라면 이 갈림을 실패로 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어떤 공동체도 하나의 목소리로 말해지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경계는 늘 다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답이었으니까요.
연탐대장의 단상노트
이번 산책을 정리하면서 계속 걸린 질문이 있어요. 우리는 무엇이 잘못됐는지 밝히는 일을 연구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너진 다음에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살아갈지까지 그려내지 않으면 연구는 절반에서 멈추는 게 아닐까요. 왈쩌가 평생 붙들었던 그 빈칸이 사실은 연구자의 자리이기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식이 문제 현장에 가닿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어쩌면 기획 단계와 사후 분석에만 지식을 놓아두고 정작 일이 벌어지는 과정 안에는 두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겠어요.
다원적 평등도 연구탐사대를 운영하는 자리에 그대로 옮겨옵니다. 연구에는 연구의 원칙이 있고 훈련에는 훈련의 원칙이 있고 공동체에는 공동체의 원칙이 있어요. 이 중 하나가 나머지를 삼키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무언가 어긋납니다. 성과의 언어가 훈련의 자리를 대신하거나 친밀함이 연구의 기준을 밀어내는 식으로요. 경계를 지키는 일은 한 번 그어두고 끝나지 않아요. 서로 다른 원칙 속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 긴장을 유지할 때만 살아 있는 것 같습니다.
다음 산책에서는 힐러리 퍼트남을 만납니다. 사실과 가치가 한 몸으로 얽혀 있다면 인간은 과연 객관성을 가질 수 있는가를 함께 물어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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