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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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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일까?

철학산책 시즌7 다섯 번째 산책 · 김수정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 자유주의적 개인주의 사회의 비판자」, 『처음 읽는 영미현대철학』


토요일 아침 여덟 시에 모이는 사람들

5번째 산책은 광복절 아침에 열렸습니다! 오늘 시작에서는 경인님께서 한 편의 벽화를 보여주셨는데요. 디에고 리베라의 「알라메다 중앙공원에서의 어느 일요일 오후의 꿈」입니다. 15미터짜리 벽 하나에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나란히 서 있습니다. 이 그림은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 표지로 쓰였습니다. 서로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로 묶이는가를 묻는 책이죠.

매킨타이어의 답은 이야기입니다. 같은 이야기를 자기 것으로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되죠. 오늘 다룰 서사적 통일성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그래서 이번 산책을 한 문장으로 이야기한다면 다음과 같아요.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답하려면, 먼저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에 답해야 한다.

매킨타이어의 주요한 사상은 '덕은 개인이 혼자 고르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전수하는 탁월함 속에서 만들어진다'라는 점이에요. 어떤 면에서는 연구와도 이어집니다. 한 편의 연구가 힘이 있기 보다 이야기가 이어지는 자리 위에 있어야만 그 연구의 의미가 비로소 정의되어지기도 합니다.

이번 시즌에서의 철학자들을 돌아볼 때, 비트겐슈타인은 의미가 공동의 규칙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화이트헤드는 존재가 계속 생성된다고 했습니다. 롤스는 정의가 공정한 규칙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매킨타이어는 이 셋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를 덧붙입니다. 언어도, 과정도, 절차도 결국 누군가의 삶이 이어지는 서사 위에서만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무지의 베일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지난 산책의 롤스의 주장을 다시 꺼내봅니다. 롤스는 원초적 입장을 설계했습니다. 자신의 재산도, 성별도, 재능도 모르는 상태에서 원칙을 고르자는 제안이었죠. 그래야 편향 없는 선택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매킨타이어는 이 전제 자체를 흔듭니다. 무지의 베일 뒤에 자아는 실재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무지의 베일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인간은 이미 누군가의 자식이고 어느 동네의 주민이며 어떤 언어의 사용자이기 때문이에요. (정말 그렇지 않나요?)

이런 자아를 매킨타이어는 연고 없는 자아(unencumbered self)라고 부르며 허구라고 봅니다. 연고를 지운 자리에 남는 것은 순수한 이성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무지의 베일 뒤에 자아는 '연고 없는 자아'라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롤스의 국가는 특정한 좋은 삶의 상(善觀)에 중립이어야 합니다. 무엇이 좋은 삶인지는 각자 정하고, 국가는 그 선택들이 충돌하지 않도록 규칙만 관리하자는 것이죠. 옳음(right)이 좋음(good)에 앞선다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매킨타이어는 이 중립이 중립이 아니라고 봅니다. 개인이 스스로 좋은 삶을 고르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두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근대 자유주의라는 특정한 전통이 내린 결론이지, 전통 바깥에 놓인 심판석이 아닙니다. 중립을 표방한 절차도 결국 하나의 전통입니다.

문제는 그다음에 옵니다. 좋음을 괄호에 넣으면 "왜 정의로워야 하는가"에 답할 길이 사라집니다. 규칙을 지킬 이유는 그 규칙이 어떤 삶을 가능하게 하는지에서 나오니까요. 무엇을 위해 사는지는 말하지 않기로 해놓았죠. 그런데 왜 그 규칙을 지켜야 하느냐고 물으면, 남는 답은 "그래야 서로 손해가 없으니까"뿐입니다. 그것만으로는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정의로울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이번 산책의 대비 구도는 여기서 선명해집니다. 롤스는 절차가 공정하면 결과도 정의롭다고 말합니다. 매킨타이어는 자신이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지 모르면 무엇이 공정한지도 알 수 없다고 답합니다.

롤모델이 사라진 자리가 덕의 상실입니다

발제는 하나의 질문에서 다시 출발했습니다. "자신이 본받고 싶은 롤모델이 있나요?"

누군가를 떠올리는 순간, 우리는 인간 자체에 대한 하나의 기준을 갖게 됩니다. 매킨타이어는 바로 이것이 덕이 존재하는 이유라고 봅니다. 덕(virtue)은 그리스어 아레테(arete)에서 왔고 탁월함, 훌륭함을 뜻합니다. 어떤 공동체에 최고로 훌륭한 사람이 있다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점이 그만큼 증명된 셈입니다. 그래서 매킨타이어의 대표작 제목이 『덕의 상실(After Virtue)』입니다. 어떤 사회에 더 이상 배울 사람이 없다는 말은, 그 사회에서 탁월함이 사라졌다는 말과 같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기준이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어떤 공동체에서 어떤 이야기를 듣고 자랐느냐가 우리가 생각하는 최선의 상을 규정합니다. 이것이 공동체가 가진 힘입니다.

인간을 최저점에서 볼 것인가, 최선의 상태에서 볼 것인가

인간 본성을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탁월함의 내용이 달라집니다. 발제는 두 시선을 나란히 놓았습니다.

하나는 최저점에서 보는 시선입니다. 자라다 말라죽는 최악의 상태를 예상합니다. 그러면 인간은 관리되고 통제되어야 할 위험이 되고, 제도의 목표는 최악의 방지로 축소됩니다. 다른 하나는 최선의 상태에서 보는 시선입니다. 가장 잘 자라 완성된 모습을 예상합니다. 지향점이 잡히면 현재의 상태는 결핍이 아니라 과정이 됩니다.

이 전환이 만드는 차이는 큽니다. 평가의 언어가 성장의 언어로 바뀝니다. 공동체의 목적이 곧 정의가 되고, 무엇을 가르칠 것인지가 자연스럽게 따라나옵니다.

탁월함은 결국 이야기가 됩니다

탁월함은 순서를 밟아 이야기가 됩니다. 먼저 지향점이 목표로 설정됩니다. 그것을 향한 선택들이 쌓입니다. 감정과 생각과 만난 사람들이 엮입니다. 그렇게 사회와 연결된 정체성이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서사는 역사적 맥락을 초월한 자유로운 인간의 것이 아닙니다. 현실에 뿌리내려 매번 다시 나타나는 통합적 반응의 결과죠. 감정에 치우치지도, 생각만으로 만들어내지도 않은, 사회와 연결된 그 사람 본연의 공동선입니다.

그래서 가치는 언제나 맥락에서 태어납니다. 1000년 중세 유럽은 거룩을 외쳤습니다. 18세기 프랑스는 자유를, 1930년대 한국은 대한독립을, 1950년대 미국은 인권을 외쳤습니다.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는 그 공동체가 결정하며, 그렇게 결정된 가치가 곧 공동선이 됩니다. 공동체주의가 교육과 전통을 끝까지 놓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좋아요'가 기준이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매킨타이어가 겨냥하는 우리 시대의 병은 정감주의(emotivism)입니다. 자신의 정서적 감정이 가장 중요한 선택 기준이 된다는 태도죠. 공동체 안에서 형성되는 정체성이 아니라 자유로운 개인이 선택하는 세계에서는, 개인의 선호가 전부가 됩니다. 우리 시대가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좋아요'인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이 태도가 국가를 어떻게 바꾸는지 네 단계로 짚었습니다. 먼저 국가가 가치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행복을 공급하는 기관으로 바뀝니다. 다음으로 효율성이 최고 가치가 됩니다. 그다음 안전과 행복을 대가로 정치 참여가 사라지고 관료제가 들어섭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사라집니다.

그 세계를 상징하는 세 직업도 함께 제시됐습니다. 관리자는 목표와 자원을 효율로 환산하되 무엇을 위한 효율인지는 묻지 않습니다. 심리치료사는 감정을 조절 가능한 상태로 다루되 좋은 삶이 무엇인지는 괄호에 넣습니다. 미학자는 감상의 포인트를 해석해주지만 참여하지 않고 평가만 합니다. 셋 모두 사회적 맥락을 떠나 객관이라는 허울로 제3자의 자리에 섭니다. 자유는 달콤하지만 그만큼의 파편화와 단절이 따라옵니다.

공동체와 사회는 다른 말입니다

우리가 자주 섞어 쓰는 두 단어, 공동체와 사회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공동체는 공유된 이야기와 정체성으로 결속합니다. 지속의 조건은 관계 그 자체이고, 이야기가 끊길 때 해체됩니다. 가정과 동네와 신앙공동체가 여기에 속합니다. 사회는 목적과 계약으로 결속합니다. 목적이 유효한 동안만 지속되고, 계약이 파기될 때 해체됩니다. 회사와 군대와 조직이 여기에 속합니다. 그러니 '사회'는 일종의 발명품입니다. 홉스와 로크와 루소가 공동체 아닌 개인들을 모으기 위해 고안한 개념이니까요.

공동체가 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공유된 정체성(shared identity)입니다. 함께 나누는 이야기가 정체성을 잇는 다리가 됩니다. 다른 하나는 지속적인 관계(sustainable relationship)입니다. 이야기를 공유해도 계속 만나지 않으면 공동체가 아닙니다. 먼 친척보다 매일 보는 이웃인 셈이죠.

여기서 따라나오는 진단을 나눠봅니다. 세대갈등은 사실 정체성의 갈등이고, 정체성의 갈등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듣고 있기 때문에 생깁니다. 몇 번 만나지 않은 관계는 같은 공동체가 되지 못합니다. 만남의 빈도는 감상이 아니라 조건입니다. 처방은 대륙마다 달랐습니다. 유럽은 대화와 토론으로 이야기를 나눕니다. 미국은 함께하는 경험으로 정체성을 굳힙니다. 동아리와 취향 모임이 공동체가 되는 것은 후자의 방식이죠.

전통은 왜 언제나 싸움터가 되는가

중세가 저물면서 철학은 존재론적 상위에 있던 '신'을 지웠습니다. 절대자 없이 현실을 구성할 방법을 찾아야 했고, 그 빈자리에 들어온 것이 서사였습니다. 이야기가 쌓이면 정체성이 형성됩니다. 서사를 공유하는 그룹은 서사적 통일성을 갖게 됩니다. 이 과정이 곧 전통이 축적되는 방식입니다.

어떤 전통이든 자기 이야기가 있고, 이야기에는 사건이 있고, 사건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물과 사건과 배경이죠. 전통 속에 심긴 상징이 의미가 되고, 의미의 연쇄가 한 사람에게 정체성과 도덕적 방향을 줍니다. 그런데 전통은 언제나 현장에서 도전받습니다. 지금도 보존할 가치가 있는가를 매번 다시 묻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통을 공유하고 가르치는 '교육'이 결정적으로 중요해집니다.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싸움이 늘 교육의 내용으로 번지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교육의 내용이란 결국 세계관과 이야기니까요. 정체성 정치란 각자의 전통으로 서사적 통일성을 이루는 가운데 벌어지는 전쟁입니다. 약점도 분명합니다. 공동체주의는 자칫 전체주의로 기울 수 있습니다. 전체를 위해 개인이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로 미끄러지기 쉽죠. 그래서 발제가 내놓은 결론은 절충이었습니다. 전체주의로 편입되지 않는다면, '자유주의적 공동체주의' 혹은 '공동체주의적 자유주의'는 어떨까 하는 물음입니다.

연구탐사대는 사회인가, 공동체인가

이제 우리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요. 연구모임의 기본값은 사실 '사회'에 가깝습니다. 목적으로 모이고 완주하면 흩어지니까요.

매킨타이어의 개념 하나가 여기서 특히 쓸모 있습니다. 실천에는 내재적 선외재적 선이 있습니다. 연구의 내재적 선은 더 정확히 묻는 능력, 반증을 견디는 정직함, 오래 버티는 집요함입니다. 외재적 선은 발표 실적과 인용과 지원금과 평판입니다. 매킨타이어의 경고는 간명합니다. 제도가 실천을 잠식합니다. 외재적 선을 관리하는 장치가 커질수록 내재적 선은 조용히 밀려납니다.

이 시간에서 우리는 네 가지 실천을 제안했습니다. 첫째, 계보 전수입니다. 신입에게 커리큘럼이 아니라 지나온 탐사의 이야기를 먼저 전합니다. 둘째, 아카이브를 전통으로 바꾸는 일입니다. 기록물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배웠는가'의 축적으로 다시 씁니다. 셋째, 도제적 짝짓기입니다. 덕은 설명이 아니라 모방으로 전수되므로 선배와 함께 한 편을 통과시킵니다. 넷째, 탁월성의 예시화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잘한 연구 두세 편을 공동체가 합의해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실천을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긴장해야하는 지점도 살펴봅니다. 전통이 탐구를 가능하게 하는 지점과 억누르는 지점을 어디서 나눌 것인가. 지난 산책에서 만난 쿤의 '정상과학'이 바로 그 위험의 이름이었죠.

'연구탐사대'라는 이름은 이미 공동체의 서사를 품고 있습니다. 탐사는 목적이 아니라 이야기의 형식이니까요. 문제는 그 이야기가 실제로 전수되고 있는가이지 않을까요?

함께 나눈 생각들

다른 사람의 정체성이 나의 정체성이 될 수 있을까 — 나눌 수 있는 것과 나눌 수 없는 것

그 사람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그 사람의 공동선을 함께 추구할 때 가능하다는 답이 있었습니다. 같은 공동체 안에서 같은 서사를 공유하고 같은 경험을 해나갈 때 공통의 정체성이 형성된다는 답도 나왔습니다. 그것이 곧 '함께 살아가는 것'으로서 인간됨과 자기정체성의 한 축을 이룬다는 관찰이었습니다.

"영향을 받을 수 있다. 함께 만들어 나가는, 버무리는 작업이 될 수 있다."

다만 조합의 권한은 나에게 있다는 단서가 붙었습니다. 정체성이 여러 가치의 조합이라면, 그 안에서 가치의 순위를 세우는 일만큼은 내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타산지석으로도 반면교사로도 남의 이야기가 내게 들어오지만, 최종 배열은 스스로 한다는 감각이었습니다.

물론, 불가능하다는 답도 분명했습니다. 공동체의 최소한의 규범은 그 안에서 살기 위해 내면화할 수 있고 공통된 서사도 내면의 가치로 자리매김할 수 있지만, 각 개인이 가진 자기만의 독특한 서사를 무시할 수는 없다는 지적이었습니다.

"공통된 서사는 공유하고 내면의 가치로 자리매김할 수 있겠지만, 각 개인이 가진 본인만의 독특한 서사를 무시할 수 없다."

시대의 변화를 짚은 답도 있었습니다. 한민족처럼 지내던 시절에는 나의 정체성이 곧 우리의 정체성이었지만, 현대에 들어와서는 나와 너의 정체성이 다르고 그것을 존중하며 사는 것이 맞다는 개념이 들어왔다는 관찰입니다. 그러면서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면 또 같다고 할 수 있지 않느냐는 물음이 함께 남았습니다. 한국이라는 카테고리에서 모든 정체성을 걷어내도 삶에 대한 애착 같은 한 가지는 남지 않겠느냐는 의견도 있었고요.

조금 더 논의가 된 영역도 있어요. 덕윤리에서 개인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사회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의 간극이 커지는 현실, 공동선의 추구와 시장경제의 효율성이 공존하지 못하는 문제가 제기됐습니다. 국가는 과연 공동체일 수 있는가, 도시국가가 아니고서는 공동체로 기능하기에 너무 크지 않은가, 그렇다면 혐오 문제는 어떻게 풀 것인가라는 물음도 나왔습니다.

공동체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고민도 이어졌습니다. 정체성을 나눌 수 없는 이주배경주민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은 발전적인 전망을 공유할 수 있는 공동체 서사를 새로 구축하는 데 있다는 제안, 그리고 인간끼리만의 공동체가 꼭 필요한가라는 물음이 함께 놓였습니다.

매킨타이어를 향한 반론도 있었습니다. 과거의 맥락이 도리어 방향을 제한하지는 않는가. 공동체가 규정했다고 해서 그것을 정말 '덕'이라 할 수 있는가. 여전히 '개인' 단위에서 정체성과 덕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단위의 한계였습니다.

연탐대장의 단상노트

이번 산책에서 매킨타이어의 철학을 통해 '연구탐사대'라는 우리만의 공동체의 이야기를 돌아보게 되었어요. 연구탐사대의 미션은 '역동적인 지식생태계를 통한 사회문제 해결(Rebuilding Intellectual Ecosystem)'입니다. 그래서 함께 하는 분들이 '역동적인 지식생태계'에 주체가 되기 위한 고민들을 하는데요. 한 편으로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자유'와 '주체성'이지만 '사회문제해결'을 강조하다보면 개인의 자유도에 영향을 주는 순간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래서 질문이 들었어요. 우리는 지금 어떤 공동체 속에 있을까. 개인의 행복을 위한 공동체인가, 사회를 위한 공동체인가.

하지만 이번 매킨타이어를 살펴보니, 공동체의 조건이 눈에 띕니다. '공유된 정체성과 지속적인 관계'. 우리가 공동체의 정체성을 고민하다가 지속하지 못할 때 모든 건 도루묵이 될 수 있다는 걸요. 그래서 연구탐사대에는 이 덕성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함께 나누고, 함께 경험하고, 함께 기록해서 나아가는 사람들로써요. 기록은 성과가 아니라 전수의 형식이라는 것을 이번에 다시 배웠습니다. '개인의 자유와 사회문제 해결로서의 책임'은 이러한 덕성을 유지할 때 우리 안에서 그 균형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보게 됩니다.

다음 산책에서는 마이클 왈저를 만납니다.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사이에서 다원적 평등을 이야기한 철학자입니다. 각 영역의 경계를 지키는 일이 정의의 시작이라면, 그 경계는 누가 그었는가를 함께 물어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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