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발적 협력을 위한 네 가지 시나리오
본 부록은 창발적 협력이 현장에서 발현될 수 있는 양상을 미래 시나리오 기법을 통해 제시합니다. 자기 자신과 조직의 양상을 본 시나리오에 대입하여 검토하고 상상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시나리오 1. 공동의 문제의식을 만들어가는 협력
서울 외곽의 한 지역에서 일하는 30대 중반의 실무자 A는 몇 년째 청년 지원사업을 맡고 있다. 공모사업 계획서에는 늘 비슷한 문장이 들어간다. 취업역량 강화, 정서 지원, 지역 정착 유도. 해마다 프로그램은 성실하게 운영되고, 참여 인원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사업이 끝날 때마다 A에게 남는 감각은 늘 비슷하다. 참여자 만족도는 높지만, 정작 청년들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지역을 떠나는 현상이 반복된다. 상담을 해도, 교육을 해도, 커뮤니티를 열어도 몇 달 지나면 다시 같은 문제가 되풀이되었다. A는 어느 순간 “청년에게 더 많은 프로그램을 제공하면 된다”는 식의 접근이 현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이른다. 그때부터 A가 붙들게 된 질문은 ‘어떤 지원을 더할 것인가’가 아니라, 청년이 잠시 머물다 떠나는 지역이 아닌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지역의 조건은 무엇인가가 되었다.
하지만 이 질문은 청년정책팀 혼자 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자리, 주거, 관계, 지역의 분위기가 모두 얽혀 있었고, 각 부서와 기관은 이 문제를 전혀 다른 언어로 말하고 있었다. 일자리 부서는 취업률을, 복지 부서는 위기 청년 발굴을, 청년센터는 참여 인원을 이야기했다. A는 처음으로 사업 기획 회의가 아니라 작은 대화 자리를 만들었다. 청년센터 팀장, 구청 일자리 담당자, 로컬 창업 지원조직 실무자, 주거 활동가, 지역 청년 두 명을 불러놓고, “올해 무엇을 할 것인가” 대신 “우리는 지금 무엇을 문제라고 부르고 있는가”를 물었다. 처음 몇 번의 대화는 순탄치 않았다. 누군가는 일자리만 늘어나면 된다고 했고, 누군가는 관계가 먼저라고 했다. 청년 당사자가 “취업을 해도 여기서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라고 말했을 때 회의실은 잠시 조용해졌고, A는 그 순간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각자의 말이 사실은 하나의 문제를 다른 자리에서 가리키고 있다는 점을 조금씩 짚어갔다. 청년 지원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청년이 머물 수 있는 조건들이 서로 이어지지 않은 채 흩어져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때부터 논의는 프로그램을 하나 더 만들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일자리와 주거, 관계가 분리되지 않게 하려면 무엇을 먼저 연결해야 하는가를 묻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결국 이들은 거창한 종합계획 대신, 작은 실험을 하나 함께 해보기로 했다. 청년센터 프로그램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지역에 남고 싶은 의사가 있는 청년 몇 명을 중심으로, 로컬 조직의 일 경험, 구청이 가진 빈 점포 정보, 활동가가 연결한 주거 자원, 청년 당사자들이 제안한 생활 조건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어보는 6개월짜리 파일럿이었다. 각자 하던 일을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청년 한 사람이 여러 제도와 조직 사이를 혼자 헤매지 않도록 하는 새로운 방식을 함께 설계했다. A는 여기서 누군가를 지휘하기보다, 서로의 말을 번역하고, 어긋난 기대를 조율하고, 무엇을 우선 연결할지 함께 정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6개월이 지난 뒤 지역이 갑자기 달라진 건 아니었다. 여전히 예산은 빠듯했고, 협력은 서툴렀고, 많은 청년들이 남게 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예전과는 분명히 다른 장면들이 생겼다. 일자리 담당자는 취업 숫자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변화를 처음으로 인정했고, 활동가는 행정과 현장이 왜 자꾸 엇갈렸는지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고 했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이제 “청년 지원사업을 더 해야 한다”는 말 대신 “청년이 머물 수 있는 조건을 어떻게 이어 붙일 것인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흩어져 있던 자원과 말, 사람들의 역할이 조금씩 다른 배열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A는 무언가를 완성했다기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다시 만날 수 있는 문제를 만들었고, 그 문제를 함께 붙들 수 있는 자리를 열어두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이전에는 없던 다음 장면이 시작되고 있었다.
시나리오 2. 흩어진 자원과 기회를 재조합하는 협력
B는 몇 년째 지역 청소년과 청년을 위한 진로· 학습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현장에서는 늘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다. 지역에 남고 싶어도 일할 곳이 마땅치 않고, 배움을 이어갈 공간도 부족하며, 무엇보다 “여기서는 뭘 해도 다음이 없다”는 감각이 너무 강하다는 것이었다. B 역시 그 말을 수없이 들었다. 문제는 분명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늘 같았다. 예산이 부족하다는 말, 제도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는 말, 이 도시에는 원래기반이 약하다는 말이었다. 어느 순간 B는 자신도 모르게 그 말들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정말 없는 것만 문제일까. 이미 있는데 서로 연결되지 않아 쓰이지 못하는 것들은 없을까. 그때부터 B가 붙들기 시작한 것은 부족함의 목록이 아니라, 흩어져 있지만 아직 제대로 묶이지 않은 자원과 기회의 지도였다.
B는 먼저 도시 안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시에서 위탁 운영하는 평생학습관은 저녁 시간이 비어 있었고, 지역 대학은 비교과 프로그램 예산을 충분히 다 쓰지 못하고 있었다. 몇몇 중소기업은 청년 채용이 어렵다고 말했지만, 정작 지역의 청년들과 만나는 접점은 거의 없었다. 카페와 독립서점, 작은 제조업체 대표들 중에는 “뭘 같이 해보고 싶다”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어떻게 연결될지 몰라 흩어져 있었다. B는 이 자원들이 원래부터 하나의 사업으로 설계된 적은 없지만, 지금 필요한 방식으로 다시 엮어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새 공모를 기다리거나 대규모 예산을 따내는 대신, 이미 있는 공간과 예산, 사람과 의지를 다시 배치하는 작은 실험을 제안했다.
처음 모인 사람들은 서로를 잘 알지 못했다. 대학 직원은 행정적으로 가능한 범위를 먼저 이야기했고, 기업 대표는 채용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의미가 있겠느냐고 물었다. 청년 당사자는 “이런 자리는 보통 하다가 흐지부지된다”라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B는 그 불신을 성급하게 지우려 하지 않고, 대신 각자가 지금 갖고 있는 자원과 지금 당장 내놓을 수 없는 것을 분명히 말하게 했다. 대학은 강의실과 소정의 운영비를, 평생학습관은 저녁 시간 공간을, 지역 기업은 짧은 현장 경험과 멘토링을, 로컬 사업자들은 프로젝트 과제를, 청년들은 배우고 싶은 것과 버티기 어려운 조건을 내놓았다. B는 이 모든 것을 하나의 완성된 사업으로 포장하기보다, “지역에서 다음 단계를 시험해 볼 수 있는 3개월짜리 공동 실험”으로 묶었다. 일주일에 두 번은 평생학습관 공간에서 작은 프로젝트 랩이 열리고, 한 번은 기업과 로컬 사업자가 돌아가며 현장을 열어주고, 한 번은 청년들끼리 자기 경험과 어려움을 정리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대학은 비교과 예산 일부를 얹었고, 시는 유휴 공간 활용이라는 명분으로 운영을 허용했다. 이 작은 구조 안에서 전에는 만나지 않던 것이 만나기 시작했다. 청년들은 “지역엔 아무것도 없다”는 감각 대신 흩어져 있던 연결의 가능성을 보기 시작했고, 기업 대표는 채용 공고를 내는 것보다 먼저 관계를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체감했다.
몇 달 뒤 도시가 갑자기 바뀐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예전에는 “없다”는 말로만 정리되던 조건들이, 사실은 서로 닿지 못했던 자원과 기회였음이 보이기 시작했다. 청년 한 명이 프로그램이 끝난 뒤 지역 기업 인턴으로 연결되었고, 다른 한 명은 로컬 사업자와 함께 작은 프로젝트를 계속해보기로 했다. 더 중요한 변화는 따로 있었다. 시와 대학, 기업과 지역 조직이 처음부터 큰 예산이나 확실한 제도 없이도, 지금 있는 자원을 다르게 엮으면 다른 시작이 가능하다는 감각을 갖게 된 것이다. B는 새로운 것을 발명했다기보다, 이미 있던 것들의 의미와 쓰임을 다시 정했고, “조건이 안 된다”는 말 뒤에 가려져 있던 가능성을 하나의 실험으로 끌어냈다. 그렇게 이 도시는, 적어도 몇몇 사람들에게는 이전보다 덜 막힌 곳이 되어가고 있었다.
시나리오 3. 권한과 책임을 다시 나누는 협력
재단에서 일하는 C는 오랫동안 여러 지역 파트너들과 함께 장애인 지원 사업을 운영해 왔다. 겉으로 보기에는 잘 짜인 협력이었다. 재단은 자원을 마련하고 방향을 제시했고, 지역의 복지관들은 현장을 맡아 성실하게 실행했다. 정기회의도 있었고, 결과 보고도 꼼꼼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C는 묘한 답답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현장 단체들은 늘 “우리 상황은 조금 다르다”라고 말했지만, 중요한 판단은 언제나 재단 안에서 내려졌다. 당사자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도 있었지만, 실제 사업의 우선순위와 자원 배분은 이미 정해진 뒤인 경우가 많았다. 현장은 실행과 책임을 더 많이 지고 있었고, 재단은 기획과 판단을 더 많이 쥐고 있었다. 협력은 있었지만, 함께 결정하고 함께 바꾸는 구조는 아니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한 지역 단체 실무자의 말이었다. 사업 종료 간담회에서 그는 조심스럽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늘 중요한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결정은 이미 끝난 뒤에 그걸 전달받는 느낌입니다.” 그 말은 C를 오래 붙잡았다. 재단은 파트너를 존중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현장을 자문과 실행의 역할 안에 묶어두고 있었던 건 아닌지, 당사자의 목소리도 ‘반영 가능한 의견’ 정도로만 다루고 있었던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다. C는 다음 연도 사업을 준비하면서, 같은 방식으로는 계속 갈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번에는 프로그램을 조금 고치는 것이 아니라, 협력의 작동 방식 자체를 바꾸는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처음 바뀐 것은 회의의 구조였다. 예전에는 재단이 초안을 만들고 지역 단체들이 피드백을 주는 방식이었다면, 이번에는 지역 단체 세 곳과 장애인 당사자 두 명, 외부 퍼실리테이터가 함께 기획 초기부터 들어왔다. 회의 주제도 “올해 무엇을 집행할 것인가”보다 “누가 무엇을 결정하고 있고, 그 방식이 실제로 어떤 결과를 낳고 있는가”를 먼저 다뤘다. 재단 내부에서는 “의사결정이 너무 느려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고, 일부 지역 단체는 “괜히 이름만 참여고 결국 책임만 더 커지는 것 아니냐”라고 경계했다. C는 모든 권한을 한꺼번에 내려놓으려 하지 않았다. 대신 예산의 일부와 프로그램 일정 조정 권한, 지역별 실행 방식에 대한 판단을 현장과 공동으로 결정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장애인 당사자는 자문단이 아니라 우선순위 논의와 평가 기준 설정 회의에 직접 참여했다. 재단은 연간 성과 목표를 단일한 수치로만 두지 않고, 지역별로 달라질 수 있는 변화의 징후를 함께 정리했다. 무엇보다 지역 단체들이 단순히 “잘 실행했는가”만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선택을 했고 왜 그렇게 판단했는지까지 말할 수 있게 회의 형식을 바꿨다.
1년 뒤, 그 협력은 예전보다 덜 매끄러웠다. 회의는 더 오래 걸렸고, 모두가 금방 동의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현장에서 느끼는 피로는 오히려 줄어들었다는 말이 나왔다. “적어도 왜 이 방향으로 가는지는 안다”, “이번에는 우리가 한 판단이 실제로 반영되었다”, “처음으로 이 사업이 남의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드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장애인 당사자가 제안한 작은 변화가 실제 예산 조정으로 이어진 일도 있었다. C는 그제야 협력의 질이 결과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한다. 누가 판단하고 누가 책임지는가의 구조가 바뀌자, 같은 자원과 같은 관계 안에서도 전혀 다른 작동 방식이 생겨난 것이다. 협력이란 누군가를 많이 참여시키는 일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실제로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만드는 구조를 만드는 일이라는 것을, C는 비로소 몸으로 배우고 있었다.
시나리오 4. 분절된 언어를 연결하는 협력
서울에서 활동하는 D는 오랫동안 중간지원조직에서 일해왔다. 사회혁신, 비영리, 임팩트투자, 로컬, 공공, 기업 CSR까지 다양한 영역의 사람들을 자주 만났지만, 어느 순간부터 비슷한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다. 다들 협력의 필요성은 말했지만, 실제로는 각자의 영역 안에서 자기 언어를 더 정교하게 다듬는 데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비영리 조직은 현장의 절박함과 공공의 책임을 말했고, 임팩트투자사는 지속가능성과 스케일을 말했으며, 중간지원조직은 연결과 생태계를 이야기했다. 재단은 전략성과 측정을, 공공은 제도적 정합성과 집행 가능성을 따졌다. 모두가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정작 함께 무엇을 바꾸고 싶은지를 묻는 자리는 드물었다. D는 언젠가부터 생태계의 협력이 부족하다기보다, 협력의 출발점이 너무 일찍 각자의 언어 안으로 흩어져버린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D가 문제라고 느낀 것은 협력의 횟수가 아니었다. 오히려 만남은 많았다. 포럼도 있었고, 네트워킹도 있었고, 제안서 단계에서 이름을 올리는 연대도 있었다. 하지만 그 만남들 대부분은 서로를 이해하기보다, 각자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자리로 끝나기 쉬웠다. 어떤 비영리 대표는 “결국 투자 언어를 알아야 대화가 된다”라고 말했고, 어떤 투자사 심사역은 “현장은 늘 중요한 얘기를 하지만 구조화된 제안으로 오지 않는다”라고 했다. D는 이 어긋남을 그냥 영역 차이로 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대규모 포럼 대신, 작고 닫힌 대화 자리를 새로 설계한다. 중간지원조직 두 곳, 비영리 단체 세 곳, 임팩트투자사 두 곳, 재단 한 곳, 공공 실무자 한 명, 그리고 로컬 기반 활동가 두 명을 불렀다. 참석자들에게 미리 부탁한 것은 단 하나였다. “자신의 조직이 무엇을 하는가”보다, “지금 생태계가 무엇을 더 이상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는가”를 먼저 가져와달라는 것이었다.
처음 자리는 예상대로 조심스러웠다. 누군가는 사회문제 해결의 본질이 희석되고 있다고 했고, 누군가는 돈이 흘러가는 방식이 너무 좁아졌다고 했다. 어떤 이는 현장의 언어가 너무 도덕적이라고 말했고, 다른 이는 투자와 성과의 언어가 너무 많은 것을 평평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불편한 기류도 있었다. 그러나 D는 이 논의를 “누가 옳은가”로 몰아가지 않았다. 대신 각자의 발화를 하나의 화이트보드에 옮기며, 서로 다른 불만과 비판이 사실은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우리는 왜 사회문제 해결이라는 공동의 목적보다, 각자의 방법과 위치를 지키는 일에 더 익숙해졌는가.” 그 질문이 생기자, 대화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비영리 조직은 자원이 문제의식을 끌고 가는 경험을 이야기했고, 투자사는 자신들 역시 익숙한 기준에 갇혀 있음을 인정했다. 재단 실무자는 “지원은 하는데, 생태계가 더 잘 연결되는 방향으로 쓰고 있는지는 확신이 없다”라고 말했다.
몇 차례의 만남 끝에 이들은 공동사업을 바로 만들지 않았다. 대신 먼저 세 가지를 함께 해보기로 했다. 첫째, 각 영역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와 성과의 언어를 비교해 보는 작은 워킹그룹을 만들었다. 둘째, 비영리, 투자, 중간지원, 로컬 조직이 함께 참여하는 비공개 학습 세션을 정기적으로 열어, 성공사례보다 “무엇이 왜 막히는가”를 공유하기로 했다. 셋째, 생태계 안에서 잘 보이지 않던 시도들을 공동으로 발굴하고, 각자의 언어로만 설명되지 않도록 함께 번역해 보는 실험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D는 중심에서 의제를 독점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의 말을 번역하고, 말이 끊기는 지점에서 다시 질문을 열고, 공통의 문제의식이 사라지지 않도록 회의를 붙드는 역할을 했다.
반년쯤 지났을 때, 생태계가 갑자기 하나로 통합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투자사는 수익성과 회수 가능성을 봐야 했고, 비영리 조직은 긴급한 현장 대응을 놓칠 수 없었으며, 공공은 제도적 제약 안에서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전에는 각자의 영역 안에서만 반복되던 언어가, 이제는 서로의 언어를 의식하며 조금씩 수정되기 시작했다. 한 투자사 심사역은 “이건 투자 검토 이전에 생태계 차원에서 지켜볼 필요가 있는 시도”라는 말을 처음으로 꺼냈고, 비영리 활동가는 “우리가 하던 이야기를 자원 배분의 언어로도 한번 써보자”라고 말했다. 재단은 공모사업을 새로 열기보다, 여러 조직이 함께 배우고 조율하는 구조를 별도 지원하는 방식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각자의 조직은 그대로였지만, 생태계 안에서 무엇을 문제로 보고 어떤 언어로 연결할 것인지에 대한 감각은 분명 이전과 달라지고 있었다. D는 그제야 알게 된다. 생태계 차원의 변화는 거대한 선언으로 시작되기보다, 서로 다른 영역이 다시 같은 질문 앞에 서는 데서 조용히 시작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