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 작동하지 않음, 현장의 목소리
- 프레임워크, 해상도를 높이다
- 고착 국면을 알리는 네 가지 감각
- 아직 묻지 못한 질문들
- 새로운 전환을 알리는 시그널
작동하지 않음, 현장의 목소리
현장에서는 언제부턴가 중요한 질문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축적해 온 다양한 시도들이 실제로 어떤 변화를 만들어냈는지, 그리고 현재의 접근 방식으로 기대하는 수준의 사회변화에 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동안 더 나은 사회를 지향하는 개인, 조직, 네트워크가 등장했고, 각자의 방식으로 다양한 실천을 이어왔습니다. 이러한 시도와 연결이 축적되면서 사회혁신 생태계는 하나의 영역으로 진화하고 분화해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생태계 내부에는 비가시적인 관계와 규칙, 작동 방식이 형성되었고, 일정 수준의 안정성과 효율성도 확보되었습니다. 또한 개별 조직 단위에서는 도달하기 어려운 성과가 생태계 차원에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회문제의 복잡성이 높아지는 가운데, 기존의 접근 방식만으로는 충분한 변화를 만들어내기 어렵다는 인식도 함께 늘었습니다. 본 연구는 이러한 인식이 무엇을 의미하며, 앞으로 생태계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탐색하기 위해 생태계 구성원 130여 명을 대상으로 심층 인터뷰, FGI, 설문조사를 진행했습니다. 그 결과, 이 문제의식은 아직 명시적인 언어로 충분히 정리되지 않았지만, 생태계 전반에 걸쳐 비교적 넓게 공유되고 있는 인식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프레임워크, 해상도를 높이다
본 연구는 현장의 인식을 보다 구체적으로 해석하고 사회혁신 생태계의 현재 상태를 진단하기 위해 어댑티브 사이클(Adaptive Cycle)을 프레임워크로 활용했습니다. 어댑티브 사이클은 시스템이 하나의 안정된 상태에 머무르기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성장하고 안정화되며, 기존 질서가 흔들리고 다시 재구성되는 과정을 반복한다는 관점에 기반합니다. 이 프레임워크는 이러한 변화의 흐름을 성장, 고착, 이완, 재조직의 네 국면으로 구분합니다. 복잡한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 시스템은 선형적으로 발전하거나 단일한 방향으로 변화하지 않으며, 각 국면을 오가며 적응과 전환을 반복합니다. 어댑티브 사이클은 특정 국면의 우열을 판단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현재 시스템이 어떤 조건과 역동 속에 놓여 있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어떤 가능성과 제약이 나타나는지를 분석하기 위한 틀로 활용됩니다.
어댑티브 사이클 Adaptive Cycle 과 국면별 특징
본 연구의 인식 조사 결과, 생태계 구성원들이 현재 사회혁신 생태계의 위치로 가장 많이 응답한 국면은 고착 국면이었습니다. 전체 응답 중 37.9%가 현재를 고착 국면으로 인식했으며, 이완 국면 26.2%, 성장 국면 22.3%, 재조직 국면 13.6%가 뒤를 이었습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고착 국면은 생태계가 정체되었거나 부정적인 상태에 놓여 있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는 성장 국면을 거치며 축적된 관계, 자원, 역할, 운영 방식이 일정 수준으로 안정화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현재의 고착 국면은 생태계가 그동안의 실험과 확장을 통해 일정한 구조와 질서를 형성했고, 생태계 내 역할과 작동 방식이 보다 명확해지면서, 효율성과 예측 가능성이 높아진 반면, 그로 인해 일정한 한계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는 상태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생태계 구성원들은 어떤 점에서 현재를 고착 국면으로 인식하고 있을까요. 고착에 대한 현장의 인식을 생태계적 관점에서 해석하기 위해, 심층 인터뷰와 FGI, 설문조사를 통해 수집한 응답을 종합적으로 분석했습니다. 그 결과, 조직과 개인의 경험 가운데 반복적으로 확인되는네 가지 인식이 존재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생태계가 고착 국면에 진입했음을 보여주는 신호인 동시에, 기존의 안정화된 구조 안에서 새로운 변화의 필요가 감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고착 국면을 알리는 네 가지 감각
첫 번째 감각, 영역 별로 각개전투를 펼치고 있지 않나
이사장 D
시민사회, 임팩트, 사회적 경제, 인권, 여성, 환경, 청년, 교육, 복지, 로컬 등 영역이 너무 분절되어 있고, 내가 속한 네트워크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회적 경제, 시민사회, 로컬창업, 소셜벤처 등이 경쟁하듯 따로따로 정책과 공적자본의 지원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편집장 A
사회혁신과 비영리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의도적인 브랜딩이었는데, 그 브랜딩이 효과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확장성과 진정성을 제한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임팩트, 비영리, 시민사회, 사회적 경제, 사회복지 등은 각자의 역할과 전문성을 구체화하며 발전해 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각 영역은 고유한 언어와 방법론, 네트워크를 형성했으며, 이는 생태계의 다양성과 전문성을 확대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영역 간 경계가 점차 선명해지는 결과가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더 나은 사회를 지향한다는 공통의 방향성은 유지되어 왔으나, 분화된 영역과 언어를 넘어 공동의 변화를 추구하는 방식에 대한 논의는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분화는 성장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생태계가 확장되는 과정에서 각 영역은 자신이 다루는 문제, 사용하는 자원, 협력하는 주체, 성과를 설명하는 언어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그러나 고착 국면에서는 이러한 전문화와 분화가 새로운 연결을 가능하게 하기보다, 오히려 각 영역이 자기 체계 안에서 문제를 해석하고 대응하게 만드는 경향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즉, 영역의 고유성이 강화되는 과정이 동시에 영역 간 공동 대응을 제한하는 조건이 될 수 있습니다.
각 영역이 개별적으로 대응하는 방식이 반복될 경우, 복합적인 사회문제를 다루는 생태계의 역량은 제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의 사회문제는 청년, 주거, 노동, 돌봄, 지역, 기후, 기술과 같이 여러 영역이 중첩된 형태로 나타나지만, 생태계의 대응은 여전히 개별 영역의 경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분절적 대응에 대한 인식은 생태계 전반에서 확인되며, 이는 고착 국면의 주요 신호 중 하나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감각, 성과 입증만을 위한 숫자를 만들고 있진 않나
또 다른 주요 인식은 ‘성과 입증’이 사업 운영과 평가의 핵심 기준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인식 조사 결과, 프로젝트나 사업의 평가 과정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항목으로 ‘성과 입증’이 31.1%로 가장 높게 나타났으며, ‘정량 성과’가 23.2%로 뒤를 이었습니다. 이는 ‘학습과 성찰’ 22.0%, ‘근본적 변화’ 23.8%와 비교할 때, 현장에서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증명할 것인가가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경향은 성장 국면에서 형성된 조건과도 연결됩니다. 생태계의 다양한 주체들은 자원을 확보하고 새로운 접근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 자신의 효과를 입증해야 했습니다. 임팩트투자, 기업 CSR, 정부 지원의 확대 속에서 측정 가능한 성과는 중요한 설명 언어로 자리 잡았고, 실제로 조직 및 생태계의 활동을 외부에 설명하고, 사회적 가치를 설득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수치 기반의 ‘성과 입증’이 핵심 기준으로 고정될 경우, 변화의 타임라인이 길거나 단기 지표로 환산하기 어려운 시도는 과소평가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관계의 변화, 인식의 전환, 제도적 조건의 변화, 학습의 축적처럼 근본적인 차원의 변화에 있어 중요한 요소들은 단기간에 가시화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증명 가능한 활동이 우선되고, 아직 증명되지 않았지만 필요한 실험은 후순위로 밀릴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됩니다. 이는 고착 국면에서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이 강화되는 한편, 새로운 시도에 대한 수용성이 낮아지는 현상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실무자 M
정성적 성과와 정량적 성과의 균형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정량적 성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서의 정량 성과는 주로 참여인원, 만족도 등 단순 수치들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팀장 C
사회적 임팩트가 나타나기까지 3~5년 이상의 장기적인 호흡과 투자가 필요한 경우가 많지만, 당장 연말에 경영진에게 보고할 확실한 숫자가 필요합니다. 실패의 리스크가 있는 새로운 시도는 당장 예산 승인 단계에서부터 벽을 넘기가 어렵습니다.
세 번째 감각, 협력 같아 보이는 협업을 하고 있진 않나
실무자 N
적극적인 협력보다는, 단순히 돈을 지원받고 수행하는 역할에 그쳤던 것 같습니다.
실무자 O
동일한 성격의 단체들과 협력하다 보니 방법론적으로나 접근 방식에 있어 다양성을 갖지 못하고, 늘 비슷한 형태의 협력이 이루어졌습니다
실무자 P
협력을 주도하는 조직의 담당사업으로 여기는 좁은 인식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협력의 참여자들은 모두 주체가 되어야 하지만, 참여의 목적이 지원을 얻기 위한 경우가 많습니다.
성장 국면을 거치며 생태계 내에는 협력의 지점이 빠르게 늘었습니다. 공동사업, 네트워크, 파트너십이라는 이름의 관계가 확대되었고, 다양한 조직과 주체가 연결되는 기회도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양적 확장에도 불구하고, 협력이 실제로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인식은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현장의 문제의식은 협력의 부족보다, 협력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활동이 역할 분담과 성과 관리를 위한 효율적 협업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 향해 있습니다.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협력 유형에 대한 조사 결과, 공동의 문제 재정의, 자원 배분과 권력 구조의 재설계, 시스템 조건에 대한 공동 논의를 포함하는 ‘시스템 조율형 협력’을 경험했다는 응답은18.4%에 불과했습니다.
이는 현재 생태계에서 이뤄지는 협력이 서로 다른 조직 간의 연결을 넘어,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수준으로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검토가 필요함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협력을 늘리는 노력을 넘어, 협력이 어떤 수준에서 작동하고 있으며 무엇을 변화시키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네 번째 감각, 성공 공식에 갇혀 실험 정신을 잃지 않았나
실무자 Q
새로운 사업을 하기엔 투자, 지원받기가 어려워 기존에 잘 됐던 사업에서 약간만 비틀어 마치 새로운 것처럼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실무자 R
한번 성공했던 레퍼런스를 계속 반복해서 사용하거나, 다른 단체에서 하던 방식을 도입해 성과가 없어도 그 방식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진 것 같습니다.
실무자 N
제가 속해 있는 분야에서는 새로운 시도보다는 기존에 했던 지원 사업을 따내서 근근이 이어가는 모습처럼 기존 관습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강한 것 같습니다.
생태계가 성장 국면을 통과하던 시기에는 성과가 아직 입증되지 않은 시도에도 일정한 자원과 여지가 배분될 수 있었습니다. 구조가 상대적으로 느슨하고 자원의 흐름도 특정 방식에 고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문제의식과 접근이 등장할 수 있었고 실험 자체가 생태계의 활력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실험의 결과와 경험이 축적되었고, 자원 확보에 유리한 방식, 심사자를 설득하기 쉬운 언어, 성공 사례로 인정받는 형식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특히 투자와 성장의 언어가 강한 기준으로 작동하면서, 사회문제 해결의 본질보다 투자 경로에 적합한 모델이 더 쉽게 주목받는 경향도 나타났습니다.
성공 공식의 형성은 생태계의 성숙을 보여주는 측면이 있지만, 그것이 지나치게 강해질 경우 새로운 문제를 기존의 틀에 맞추어 해석하거나익숙한 사업 형식을 반복하는 방식으로 수렴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프로그램과 프로젝트는 계속해서 등장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새로운 접근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자원 확보와 평가 기준에 맞춰 시도들이 점차 획일화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커지고 있습니다.
아직 묻지 못한 질문들
생태계 구성원들은 그동안 사회문제 해결의 주체로 자신을 인식해 왔으나, 문제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조건의 일부로서 스스로를 성찰하는 과정은 충분히 갖지 못했습니다. 주로 사회문제와 그 원인을 외부에 두고, ‘무엇을 변화시킬 것인가’, ‘누구를 지원할 것인가’, ‘어떤 변화를 산출할 것인가’에 대해 질문해 왔지만, 근본적 변화는 시스템 내부의 작동 방식이 변화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러한 성찰적 인식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문제를 정의하는 언어, 자원을 배분하는 방식, 관계를 구성하는 구조, 성과를 판단하는 기준은 사회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도구이면서 동시에 생태계 자체를 작동시키는 방식입니다. 성과 지표는 어떤 활동이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받는지를 결정하고, 자원 배분 기준은 어떤 조직과 시도가 지속될 수 있는지를 좌우하며, 협력의 방식은 누구의 경험과 언어가 의사결정에 반영되는지를 결정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작동 방식이 어떤 가능성을 열고 닫아왔는지, 무엇을 가능하게 하고 무엇을 제한했는지에 대한 검토는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그 배경에는 생태계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확장과 생존, 자원 확보와 성과 입증이 우선될 수밖에 없었던 조건이 있습니다. 유의미성을 증명해 내야 하는 환경에서 실패와 한계, 잘못된 가정을 드러내는 일은 쉽지 않았고, 시행착오를 공동의 자산으로 축적하기보다 자기 조직의 정당성과 지속 가능성을 우선 방어하는 선택이 반복되기 쉬웠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개별 활동의 성공과 실패를 평가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러한 활동을 가능하게 하거나 제약해 온 생태계의 작동 방식을 함께 묻는 일입니다. 이는 책임을 특정 주체에게 돌리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생태계가 다음 국면으로 이동하기 위해 갖춰야 할 조건을 찾는 과정입니다.
새로운 전환을 알리는 시그널
현장에서 확인된 네 가지 감각은 단순한 문제의 나열로 보기 어렵습니다. 이는 생태계 구성원들이 그동안 당연한 것으로 수용해 온 구조와 방식에 대해 새롭게 성찰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현재의 상황은 생태계가 고착 국면에 정체되어 있다는 의미만으로 해석되기보다, 새로운 국면으로의 전환이 요구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변화의 신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회혁신학자 프란시스 웨슬리(Frances Westley)는 이러한 전환기를 ‘의미의 공백(meaning vacuums)’으로 설명했습니다. 이는 기존의 규칙, 의미, 판단 기준이 흔들리는 반면, 새로운 기준은 아직 명확히 형성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의미의 공백은 부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기존 언어로 충분히 포착되지 못했던 경험들이 새롭게 해석되고, 기존 한계를 넘어서는 질서와 문화가 형성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입니다.
의미의 공백은 불확실성과 가능성이 동시에 열리는 상태입니다. 익숙한 답이 더 이상 충분히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혼란이 발생하지만, 동시에 이전과 다른 선택을 내릴 수 있는 여지도 만들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이 공백을 성급하게 메우는 것이 아닌, 그 안에서 무엇을 다르게 질문하고 시도해 볼 것인지를 탐색하는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전환기는 생태계의 조건을 다시 구성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의 시간’ 일 수 있습니다.